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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검은 가와가닌

Views 476 Votes 0 2015.12.08 14: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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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카와가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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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갑자기 예정도 없이 서둘러서 델타를 떠나는 것에 대해 궁금해 하는자넷트에게 굳이 어줍잖은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스월드의 정신요양원에서 퇴원하게 되는 앤지와의 관계를 그녀에게 들려 주었다.
  한동안 줄곧 과묵하게 운전을 하던 자넷트는 새삼스럽게 곰살궃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피제이, 우리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 쉬었다 가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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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북극의 설원을 바라보며 맥을 놓고 있다가  그녀의 말에 짐짓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시계를 보았다.  델타를 떠난 지 불과 한 시간 남짓했다.
  “ 그러지요. 그리고 운전을 교대합시다. “
  자넷트는 휴게소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캠퍼 뒷자리에 설치되어 있는 키친으로 가서 가스렌지에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곧 이어 자넷트는 머그컵 두개에 커피를 가득 담아 들고 소파에 와서 앉으라고 불렀다.
  “ 자 따끈하게 한 잔 드시고 마음을 진정하세요. 지난 과거를 말씀하느라 마음이 약간 흥분되었을 거예요.  이해해요. “
  “ 고마워요. “
  “ 그러나 나와 일 년 넘게 교제하면서 내게 단 한 마디도 그런 사연을 들려주지 않았던 당신에게 존경의 뜻을 표해야 할지 아니면 그저 그렇고 그런 남의 일로만 생각해 버리고 말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
  그녀는 커피맛을 음미하듯 천천히 마셨다.
  따끈한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울적해 있던 기분이 한결 누그러졌다.
  “ 그런데 당신 얘기를 듣고 보니 미국에서만 살아온 나로서는 잘 이해되지않는 부분이 있어요.  한마디로 앤지나 당신은 세상을 너무 힘겹게 살아가고있는 것 같아요.  서로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다면  두 사람이 그렇게까지불행스럽게 고통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도덕 관념이아무리 서구적인 것과는 다르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감성은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 남녀 간의 애정적인 면에서 말입니다.앤지는 이미 두번이나 결혼을 했고 미국생활도 십 여 년 이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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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만남으로써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 충격으로 결국 정신요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면 서로가 불행을 자초한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물론 이해는 해요.  당신이 무조건적으로 앤지를 위해 인간적이든 애정적이든 커다란 희생을 할 수도 없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도 방법은 있지요.
  “ 무슨 뜻이예요. ? “
“  당신이 순수한 애정을 바칠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거예요. 그 결단은 당신만이 내릴 수 있는 거예요.   그녀가 남편을 둔 유부녀라는 생각만 한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나 한번 식어버린사랑의 열정이 소생한다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사람들은 실감을 못하는 편이예요.  지난 과거의 애정을 돌이켜보며 현실
적으로 다시 그 열정이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강하게 가져보는 거지요. 때로는 그 환상을 쫓기도 하고 또는 환상으로부터 추격을 당하기도 하고,인간은 어차피 그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서도 과거와 현실의 반복을피할 수 없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아무튼 그녀는 두번이나 정신요양원에 입원을 했어요.  그녀의 말대로 처음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입원을 했다 할지라도 두번째는 거의 타의에 의해 입원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뜻하겠어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자제력을 거의 상실했다는 뜻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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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나로서는 더더욱 지금의 앤지를 외면할 수 없어요. “
  “ 물론이죠. 중요한건 그녀가 하루 빨리 환상과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
  “ 나로서는 헷갈리고 있어요. 무엇이 실상이고 허상인지, 자 다시 떠납시다."
  “ 그러세요. “
  나는 운전석에 앉아 사방을 두루 살폈다.  곧 눈이라도 내릴 듯 회색빛 하늘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저녁 늦게라도 앵커리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동을 걸고 가속폐달을 밟았다.  앤지에 대한 얘기를 끝내고 나니 자넷트와의 사이에 돌연히 어색하고 냉각된 기분이 감도는 것만 같아 툭 터놓고 얘기를 들려준 것이 조금은 후회스럽기도 했다.
휴게소를 떠난 지 불과 한 시간도 되기 전에 먼 시야에서부터 밀려오던 잿빛 하늘은 드디어 바람과 함께 눈을 몰고 왔다. 나는 눈발이 날리는 허공을 살피며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앉아 있는 자네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침착하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했다.
  “ 자넷, 눈이 오잖아요. “
윈도우 와이퍼를 일단 저속으로 틀어놓았다. 그녀는 그냥 웃을 듯 말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의미있는 시선을 보냈다.
  “ 알라스카에서 눈이 내리는 것은 너무나일상적인 현상이 아닌가요. “
  “ 그렇지만 혹시나 눈이 많이 오면 오늘 저녁까지 앵커리지에 도착하는데 지장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걱정이 돼서요. “
  “ 걱정마세요. 준비는 단단히 해 가지고 왔으니까, 오늘 도착 못하면 내일이라도 도착하면 되잖아요. 캠퍼에서 잠을 자도 모텔보다 편할 테니까.                                                                                                                                                                                   224
피제이는 생각보다 꽤 순진하신 것 같아요. 어린애 같기도 하구요. “
  “ 자넷, 누굴 놀리는 겁니까. “
  “ 나쁜 뜻으로 한 얘기가 아니예요.  좋은 의미로 받아 들이세요. “
  그녀는 내 곁에 바짝 다가앉으며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서서히등줄기를 훑어 내려가며 나직이 속삭였다.
  “ 피제이, 지금 당신과 나는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고 있는 거예요. 영원한 한 순간 속에 말이예요. “
  그녀의 손이 목덜미에 머무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더운 입김을 귓속에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 그래요. 그저 끝없이 달리면서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욕망이예요. “
눈발이 점점 거세게 차창에 부딪히며 와이퍼에 씻겨나가고 있었다. 조그마한 간이 레스토랑과 주유소가 있는 휴게소에 이르렀을 때 눈은 제법 땅위에 쌓였고 레스토랑 앞에 주차하며 다시 한번 걱정스럽게 자넷트를 쳐다보았다.
  “ 염려 되세요. ? “
  “ 그래요. “
  “ 안심하세요. 내가 운전할 테니까 우리 레스토랑에 가서 간단히 요기나 하면서 쉬었다 가요. 아직은 눈이 깊이 쌓이는 시기가 아니예요. 가다보면 날씨가 개일 거예요. 남쪽 하늘을 보세요. 햇빛이 드리웠잖아요.  어서 내려요. “
그녀는 서둘러서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아담하고 조그마한 실내에는 여행자들이 몇몇 앉아있을 뿐 한가했다.  나는 자넷트를 먼저 자리에 앉게 하고 공중전화 박스에 가서 앵커리지의 폴에게 전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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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네 지금 어디있어. “
  “ 지금 앵커리지로 가고 있는 중인데 휴게소일세. “
  “ 휴게소라니,  비행기로 오는 것이 아니고? “
  “ 자넷트 알지 ? “
  “ 자넷트라니, 아니 자네를 좋아한다는 선생님 말인가 ? “
  “ 아무튼 그녀의 캠퍼를 타고 가고있는 중일세.  그녀가 마침 앵커리지에 가 있는 아들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하게 되었어. “
  “ 거 잘 됐군.심심하지 않고, 그러나 저러나 혹시 그 여자가 자네에게 빠져 유혹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 늦어도 오늘 중으로 도착해야 하네. 내일 아침 바로 스월드로 가야하니까. “
  “ 그런데 지금 눈이 내리고 있어. “
  “ 운전 조심해. 물론 자넷트는 알라스카에서 오래 산 사람이니까 내가 안심은 하네만. 아무튼 내가 앤지에게 다시 전화 연락은 해 놓겠어. “
  폴과 전화통화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가 자넷트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이미 커피를 받아놓고 있었다.
  “ 피제이, 뭘로 하시겠어요. “
  “ 나는 좀 얼큰한 스패니쉬 오므렛이 좋겠어요. “
  “ 그래요. 나는 토스트와 소세지 그리고 계란후라이로 하지요. “
그녀는 웨이츄레스를 불러 주문을 하고나서 꽤나 은근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 폴이라는 친구와 통화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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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요. “
  “ 나와 함께 여행중이라고 했어요. “
  “ 오히려 자넷트와 동행한다고 하니까 안심하는 눈치였어요. “
  “ 너무 마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여유를 갖고 여행하는 게 좋아요.
욕심같아서는 당신과 함께 하룻밤 어디서 머물고 내일 앵커리지에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나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듯 넌지시 제안을 했다.
  “ 폴과 앤지가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 서로가 앵커리지에서 함께 시간을 가질수 있을 거예요. “
  “ 피제이, 앤지를 집에다 데려다 주고 곧장 떠날 계획인가? “
  “ 일단은 그럴 생각이예요. “
  “ 그렇다면 저도 앵커리지에서 며칠 머물면서 기다릴 수 있어요. 그리고 저와 함께 캐나다 국경을  넘어 미시시피로 함께 여행하는 것이 어때요? ”
그녀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 자넷,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서 저도 마음이 괴롭구요. 앵커리지에 도착하여 앤지를 퇴원시킨후 내 계획은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나도 당신이 그토록 가고 싶어하는 당신의 고향에 가 보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당신과 함께 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당신의 뜻을 거절했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
 자넷트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났을 때 밖엔 바람을 동반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얼마간 휴식을 취하고 나서 다시 캠퍼에 올랐을 때 자넷트는 시동을 걸고 와이퍼를 돌려 차창에 쌓인 눈을 말끔히 닦아낸 후 시동을 걸었다.
  “ 피제이, 눈이 걷힐  때까지는 내가 운전 할께요. 그리고 도중에 휴게소에서한 번만 더 쉬면 앵커리지에 도착할 수있을 겁니다. 나는 당신을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 책임이 있으니까요. “
그녀는 전방을 주시하며 의미있게 웃었다.
자넷트와 나는 눈발이 바람에 흩날리는 차가운 대기를 가르며 마을의 전경이나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없는 산림과 계곡을 지나 강행군을 계속했다.
나는 은근히 긴장감에  쌓이기도 했으나 자넷트의 노련한 운전과 침착한 표정이 믿음직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로맨틱한 감상에 젖기도 했다.
  “ 자넷, 당신 운전 솜씨가 나보다는 상당히 노련하군요. “
  “ 글쎄요. 노련하기보다는 나는 이길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지요. 몇 년간이나 이 길을 왕래하며 여행을 했으니까요. 앞으로 한 시간 정도면 인가도 몇 채 있는 주막의 휴게소가 나올 거예요. 그곳에서 푹 쉬었다 가면 좋겠어요.
지난 밤에 과음을 했나봐요. 피로하군요. “
  “ 그럼 내가 운전을 할까요. “
  “ 아니예요. 그곳까지는 내가 운전하겠어요. 이 길에 익숙치 못한 당신에게 운전을 맡기고 싶지 않아요. “
  “ 자넷, 조금 전에 나는 한국에서 군에 입대하여 훈련받던 어느 순간을 생각했어요. “
  “ 어떤 일이 있었나요 ?
  “ 겨울철에 사격훈련을 나갔었어요. 소총사격을 하기 위해 사선에 올랐는데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과녁이 잘 보이지 않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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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손이 얼어붙듯 마비돼서 방아쇠도 당길 수가 없었지요.  훈련 조교와 감독 장교가 뒤에서 호통을 치고 닥달을 하는 바람에 총을 끌어앉고 방아쇠를 당기다보니 총알은 그저 허공으로 모두 빗나가고 말더군요. 그래서 그날은 병영으로 돌아와 그 시간에 사선에 올랐던 대부분의  훈련병들은 사격점수 미달로 특수기합을 받고 꽤나 아팠죠. “
  “ 당신은 지금 눈 길을 여행하면서도 그런일  회상하는 걸 보니 상당히 긴장하신 것 같군요. “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 휴식을 취하기로 예정했던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바람은 잔잔해졌고 눈도 걷히고 있었다. 자넷트는 주차장 한구석에 캠퍼를 세우며 피로한 눈빛으로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 이곳에서 앵커리지까지는 두 시간 반 정도의 거리예요.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우리 이곳에서 마음놓고 한 잠 자든지 아무튼 푹 쉬고 떠나요. “
나도 지난밤  잠을 설쳐 피로가 쌓인 때문인지 졸음이 밀려왔다. 자넷트는 뒷자리에 가서 개스 히터를 켜 놓고 소파에 깊이 기대 앉으며 내게 손짓했다.
  “ 피제이, 이쪽으로 와서 편히 쉬세요. 졸려서 못견디겠어요. “
내가 그녀 곁에 앉아 담배를 한대 피워 물자그녀 역시 담배를 한대 피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담배를 한 개피 건네주고 불을 붙여 주었다.
담배를 함께 피우며 휴식을 취하는 동안 가벼운 침묵이 흘렀다. 자넷트가먼저  눈을 붙이고 잠을 자겠다고 하며 간이 침대로 가서 누웠고 나에게도 소파에 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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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이라도 잠을 자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리고 나서 서로는 누가 먼저 인지도 모르게 깊은 수면에 빠져들어 버렸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고 자넷트는 커피를 마시며 나를 바라보고 빙긋 웃었다.
  “ 일어나서 커피 한잔 드시고 기분전환을 좀 하세요. 피곤 하셨나봐요.
코까지 골던데. “
  “ 코를 골아요 ? “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부비며 크게 기지개를 폈다. 개스 히터를 피워놓은 캠퍼 안은 그녀의 말대로 모텔 방보다는 훈훈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가져다 준 따끈한 커피를 마시자 한결 개운해지면서 피로가 일시에 풀려나가는 것만 같았다.
  “ 어찌 되었든 정말 기분 좋게 한 잠 잤어요. 자넷은 ? “
  “ 저도 잘 잤어요. 우리 레스토랑에서 식사한후 출발해요. 피제이나 저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시간이라서 정말 아끼고 싶어요. “
  그녀는곁에와서 주저앉으며 스스럼없이 내 품에 파고 들었다. 그녀의 몸내음이 물씬 코 끝에  와 닿았고 겉보기에 야윈 듯 한 체격과는 달리 탄력있는 그녀의
몸매가 전신을 자극해 왔다. 그녀는 한 손으로 나의 목덜미와 가슴을 애무하며 가벼운 신음 소리를 냈다.
  “ 피제이, 당신이 날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이 순간 만큼은 나의 모든것을 주고 싶어요. “
  천천히 입술을  애무해 나가다 곧 그녀의 입을 열어 깊숙한 키스를 나누었다. 전라로 드러난 그녀의 몸매를 보는 순간 그녀가 아닌 다른 여인을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북극의 대지에서 가슴
속에 응어리진 모든 감정을 털어  버리기라도 하듯 그녀의 육체를 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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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극의 대지 위에 욕정을 뿌리면서 죽음보다 더 깊은 어둠속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침 일찍 눈을 떴을 때  자넷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샤워를 마친듯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 피제이 저는 당신의 친구 폴이 오기전에 먼저 나가겠어요. 내가 폴에게 전화할테니 그리 아시고 알라스카를 떠나기 전에 나와는 꼭 한번 만나야돼요. 약속하지요 ? “
  나는 자리에 누운 채 웃어보이며  그러겠노라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는 소지품을 챙긴 후 내게 다가와 침대에걸터 앉으며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 잘 다녀와요. “
  “ 자넷, 고마워. “
  그녀가 방을 나간 뒤에도 나는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곧 폴이 오면 함께 스월드로 가서 앤지를 데리고  올 생각을 하니 착잡해 오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가 쾌유되었으면하는 바램 뿐이었다.
  폴이 모텔로 나를 데리러 올 때 그는 아예 커피와 도너츠를 내 몫까지 사들고 왔다. 그는 나를 차에 태우고 곧장 출발하며 의미있는 시선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 자네 혹시 여선생님한테 마음 빼앗긴 건 아니지 ? “
  “ 무슨 소릴 하는 건가. “
나는 시침을 뗐다.
  “ 어젯밤 자넷트와 있었던 일은 즐거웠던 장면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리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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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훤히 다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 그쯤 해두게. 미국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친구가 아닌가. “
  “ 자네도 이제는 좀 진보적으로 변한 것 같군. 좋은 일이지. “
  폴은 도너츠를 한 입에 넣고 씹은 후 커피를 달게 마셨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델타로부터의 긴 여행의 피로가 연장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 피제이 어제 앤지와 통화를 했는데 그녀는 혼자서 일단 토기엑의 집으로 가서  딸을 데리고 다시 나오겠다는군.그리고 멀리여행을 떠나겠다는 뜻을 말하던데 자네는 어쩔 셈인가? “
  “ 앤지는 뭐라고 하던가.? “
  “ 노골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네를 만나본 후 행선지를 결정하겠다는 거야.”
그말을 듣고 막연한 생각에 한동안 차창 밖에만 바라보았다. 지난 밤 함께 지낸 자넷트의 체취가 진하게 되살아나는 것만 같아 짐짓 눈을 감았다.
  “ 피제이, 자네 의견은 어때? “
  “글쎄 나도 앤지와 일단 만나서 상의를 해 봐야겠어. “
하품을 하며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폴을 쳐다보았다.
  스월드의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 막 떠오른 아침 햇살이 바다의 수면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고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폴과 함께 요양원으로 들어섰을 때 앤지는 벌써 떠날 채비를 하고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오셨군요. 폴한테서 계속 연락을 받고 있었어요. 폴, 늘 이렇게 수고해주시니 무어라고 감사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준비가 다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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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럼 지체할 것 없이 미세스 파커를 만나 퇴원 수속을 하지. “
  폴은 서둘렀다.
  “ 그러지. “
  나는 너무나 침착한 앤지의 태도에 오히려 불안함을 느끼며 미세스 파커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녀는 변함없이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자리를 권했다.
  “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아시다시피 앤지는 이곳에 두번째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겁니다. 제 의견으로는 더 이상 이런 요양원에 입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에게는 사교나 원만한 인간관계가 무엇보다 절실히필요할 뿐 더러 여행 또는 전지요양이 가장 효과적인 치유방법이라고 권하고싶습니다. “
  미세스 파커는 앤지의 우울증이 요양원보다는 인간관계라든가 환경변화를통해 안정된 리듬을 찾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치유방법이라며 우선 여행을 겸한 전지요양을 적극 권유했다. 나는 그 뜻을 이해하고 앤지와 상의하여대처하겠다고 말하고 그녀가 내놓은 앤지의 퇴원서류에 서명한 후 막연히 조급한 마음으로 서둘러서 요양원을 빠져 나왔다.
  차를 타고 아침 햇빛이 드리운 아름다운 스월드의 포구를 떠나면서 나는 다시는 이곳 요양원에서 앤지를 만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로 남을 것같은 애잔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폴이 앵커리지에 가서 식사를 하고 떠나는 것이 어떠냐고 앤지에게 묻자 그녀는 좋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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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지, 원장과 얘기해 봤어. 쾌적한 곳으로 여행을 하든지 어디 휴양지를 찾아가서 한 동안 쉬는게 어때 ? “
  “ 저도 그걸 원해요. 하지만 저 혼자 아이를 데리고 떠나봐야 스월드의 요양원이나 다를 바 없을 거예요. “
  “ 그런 뜻은 아니지. 나와 함께 갈수 있는 곳으로 말이야. “
그녀는 와락 달려들며 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말이 없었고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어디로 떠나야 할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했다. 마치 서울에서 가끔 들어보았던 유행가 제목처럼 내 마음 갈곳을 잃어 미아가 된듯 막막해 왔다.
  “ 폴, 앤지와 함께 자네의 고향인 몬타나에 가면 어떨까 ? “
순간적으로 불쑥 말을 꺼냈다.
  “ 그래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일단 여행 코스로 잡아두어도 좋고 한 동안 머무는 것도 좋고, 간다면 내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연락해서 앤지와 자네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도록 하겠네. “
    폴은 오랜만에 나의 말이 꼭 마음에 든다는 듯 아침에 나를 모텔에서 만나 함께 올 때와는 달리 싱글벙글 웃으며 백밀러를 통해 앤지와 나를 살펴보았다.
  “연지 생각은 어때 ?  우선 몬타나로 가는 것이. “
그녀는 그제서야 머리를 들고 몸을 일으키며 나의 표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재만씨가 좋다면 저는 상관없어요. “
그녀의 말투가 매우 단순하고 부담없이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이 단 한마디대화를 주고 받기 위해 그녀가 두번이나 요양원에 드나 들었고 나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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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밤을 고민하며 잠 못 이루었는가 하고 생각하니 허탈감이 일시에 밀려왔다.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앤지와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초췌하고 쓸쓸해 보였다. 십이 인승의 조그마한 여객기 트랩에 오르기 전에 그녀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고 서서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 마음 편하게 가지시고 이 삼 일만 모텔에서 기다리세요.  제가 돌아 올때 연락드리겠어요. “
  “ 그래.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다녀와. 준비는 내가  해 놓을테니. “
  그녀를 가볍게 포옹하고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녀는 나를 다시 한번 빤히 쳐다보며 손을 잡았다.
  “ 그럼 다녀올께요. 폴 고마워요. “
  “ 앤지 가능하면 내일이라도 서둘러서 돌아오세요. 자 안녕. “
폴과 나는 그녀가 트랩을 올라 조그마한 창으로 얼굴을 비추며 활주로를 미끄러져가는 것을 보고나서 돌아섰다.
  “ 피제이, 자네 앤지가 오면 정말 어디로 가고 싶은가. “
  폴은 모텔 앞에 차를 세우며 몹시 궁금하고 동정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 걱정말게. 인간관계에서 만나고 이별하고 떠나고 머무는 것을 빼면 무엇이 남겠는가. 영원한 이별도 또 만남도 없어. “
 “ 이 친구 더욱 마음 쓰이게 만드는군. 푹 쉬고 있게. 저녁에 다시 올테니 술이나 한잔 하자고. “
  “ 그래, 아무튼 고마워. “
나는 폴을 돌려보내고 지난 밤에 투숙했던 방을 다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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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리자를 데리고 돌아오면 어디로 떠나야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으나 그저 막연할 뿐이었다. 나는 지도가 첨부된 여행 가이드 책자를 펼쳐가며
미국 내의 여러지역과 심지어 구라파 남미 아프리카 등지까지 살펴보았다. 별의별 궁리를 다 하다가 시선을 북극점이 통과하는 그린랜드에 맞췄다.
앤지와 함께 그곳으로 떠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폴의 말에 의하면 그린랜드에는 월남전이 끝나면서 난민으로 월남을 빠져나온 한국인 젊은이
한 사람이 지금 그리랜드에 정착하여 에스키모 여인과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했다. 덴마크의 자치령으로 아직도 추장을 중심으로 한부족을 이루고있는 원시적인 북방의 넓은 평원에 나는 때 아니게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폴과 상의하기 전에 일단 여행사를 선정하여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폴에게 얘기하면 나의 뜻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일 뿐 사실은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답답하리만큼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다음날 혹시 앤지로부터 연락이 있을까 하는 기대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게 자넷트가 일곱 살 난 그녀의 아들을 데리고 모텔로 찾아왔다. 구내 전화로 연락을 받고 커피솝으로 내려가 보니 그녀는 화사한 정장을 하고 아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자넷트의 또 다른 일면을 보는 것 같았고, 여자는 꾸미기에 따라 느껴지는 용모와 감각이 색다를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 자넷, 정말 아름답고 멋지군요. “
  “ 그래요. 고마워요. 앉으세요. “
자리에 마주 앉아 그녀는 아들을 보고 내게 인사를 하라고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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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 피제이 아저씨야. 인사드려 뵈었든 기억이 나지 ? “
  “ 안녕하세요 ? “
  “ 밥,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풀 네임이 뭐지 ? “
  “ 로버트 워커 주니어예요. “
  “ 그래, 아빠의 이름을 그대로물려 받았구나. “
  “ 폴에게 전화했더니 아직도 이곳에 계신다고 하더군요. “
  “ 그래요. 앤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자넷트는 아들에게 커피숍 입구에 있는 가족오락실에 가서 게임을 하며 놀다가 오라고 했다. 아들이 자리를 뜨자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 돌아오면 함께 떠나기로 작정했나요?”
  “네.”
  “ 어디로? “
  “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린랜드로 갔으면 합니다.”
    “ 뭐라구요 ! “
 그녀는 대뜸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천천히 나를 살폈다.
  “ 그린랜드에는 특별히 가야할 이유가 있나요?”
  “ 아니요. 그저 호기심이지요. 그곳에 가면 문명의 이기도 벗어나고 앤지에게는 정신적이나 관념적인 장애가 없을것 같아서요. “
  “ 피제이, 지금 당신은 뭔가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면 자기도피를 위해 고민하고
있는것이 분명해요. 앤지가 그렇다고 당신마저 그러시면 안됩니다. 지금 당신이 그린랜드에서 정착할 수있다고 생각하세요?’

                                                                                   
  “거기까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북단 지점 영원히 얼어붙은 대지, 낮과 밤이 시작되는 곳, 빛과 어둠을 가르는 명암의 영점지대 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알라스카의 북쪽이나 그곳이나 무엇이 다를까요. “
  “ 어차피 우리들은 모두 사회에서 부딪히며 자신을 길들이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어 있는 존재예요.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한다면 나도 꽤나 호기심 있게 들어주겠어요. 그렇지만 피제이 당신만은 그런식으로 문제를 피해선 안돼요. “
  “ 자넷, 때로는 환상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있는 게 인간이기도 해요. 불행한 경우도 있지만 인간은 그것을 수용하는 잠재력도 있어요.  마치 빛과 어둠의 조화처럼 말입니다. 빛이 어둠을 쫒아내는 것 같아도 결국 어둠 속에서 휴식을 하고 어둠은 빛을 그리며 그 생명을 지니고 있듯이 말입니다. “
  “ …….”
잠시 커피를 마시는 사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자넷트로서는 내가 이방인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커피숍  매니저 여자가 내게 다가와 폴에게서 걸려 온 긴급전화를 알렸다. 나는 카운터로 가서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 폴, 나야. “
  “ 피제이, 자네 지금 자넷트와 함께 있지 ? “
  “그래 “
  “ 그럼 그녀보고 내 세스나기가 있는 데포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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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오지로부터 방금 연락을 받았어. “
  “ 무슨 일이야 ? 앤지를 데려가라는 거야 ? “
  “ 놀라지 말게. 두 시간 전에 앤지가 샷건으로 자살을 했다네. 죠오지가 와달라 는 거야. 자네에게 전해줄 것이 있다네. 지금 비행장으로 나갈테니 곧바로 그리로 오게.”
폴과 전화를 끊고 휘청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시야가 어두워지고 정신이 혼미해 왔다. 자넷트의 모습이 멀고 가깝게 흔들리고 있었다.
  “ 피제이, 무 슨 일이예요. 말해 보세요. “
  “ 앤지가 자살을 했어요. “
  자넷트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자넷, 나를 폴에게 데려다 주세요. 비행장으로,…….”
  나는 그녀에게 외쳤다. 순간이었지만 그곳에 가야할 이유를 찾을 수없었다.
앤지가 죽었다고 폴은 말했지만 나는 앤지가 죽은것인지 나와 앤지의 꿈 자체가 이미 모두  다 죽어버린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앤지가 없다면 나를 위해서라도 꿈은 남아있어야 했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꿈이 아니라 이미 따스한 체온이 가신 채 죽어있는 앤지 였다.
  “ 피제이, 괜찮아요 ? “
 자넷트는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비행장에 막 도착했을 때 폴은 격납고에서 자가용 세스나기를 끌고 나와 활주로에 들어설 준비를 이미 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넷트가 세스나기 옆에까지 다가와서 폴에게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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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이지요. 처음 뵙겠어요. 자넷트예요. “
 “ 저도 얘기 들어서 알고 있어요. “
  “ 피제이를 위해 애쓰는 걸 보니 저도 고맙게 느껴지는군요. 잘 돌봐 주세요. 너무 애처로워 그냥 보아넘길 수가 없군요.
  폴은 머리만 끄덕거렸다.  그는 내가 먼저 기내에 오르게끔 해주고 나서 반대편 조정석에 올라 앉았다.
  “ 피제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께요. “
자넷트는 비행장 대기실 입구로 걸어가며 두어 번이나 돌아다 보았다.
폴은 엔진 시동을 걸고 활주로 입구로 나아가 관제탑과 신호를 주고 받으며 잠시 대기하다가  이륙신호가 전달되는 즉시 활주로를 전진해 나갔다.
나는 세스나기가  이륙할 때  느끼는 곡예와 같은 전율도잊은 채 폴이 항로에 진입할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 피제이, 이제 눈을 뜨라구. “
폴이 지르는 소리에 번쩍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세스나기는 벌써 시가지 상공을 벗어나 해안선을 따라 날고 있었다.
  “ 자네가 나를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나도 몹시 가슴이 아파. “
폴은 무엇인가에 저항하듯 볼면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어찌 자네 탓인가. “
  “ 그렇게 죽다니, 정말 못난 사람들 같으니라고. “
 폴의 그 말에는 앤지의 죽음에 나도 책임이 있다는 뜻이 분명하게 포함돼 있었다.
그것은 왜 진작 앤지를 구해내지 않았느냐는 원망의 뜻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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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비행기가 계곡사이를  빠져 다시 구름사이를 뚫고 지나가곤 할때마다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끔찍한 공상을 해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앤지가 샷건으로 자살하고 피투성이가 된 모습과 그녀가 당했을 순간적인 고통을 상상하자 전신이 떨려왔다. 어제 그녀가 토기엑으로 갈때 그녀와 어디론가 떠나겠다는 뜻을 내가 먼저 밝히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는 정신적인 괴로움은 있을망정 자살이라는  극한 상황에는 이르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했다. 왜냐하면  앤지 자신에 대한 자학증 때문에 생긴 우울증과 욕구불만이내게로 집중되면서 마침 그녀가 가장 갈망하는 욕구에 내가 응하는 태도를밝히자 오히려 일종의 허탈감에 못이겨 자살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나의 애정의 굴레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잠재의식도가졌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했다.
  “ 폴, 그녀는 왜 자살을했을까 . “
  “ 자기 자신에 대한 자제력을 상실한 극도의 상황에서 자네에 대한 애정의 소유가 완전한 것이라고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끔찍한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라 .”
  “ 이세상에서 완전한 소유란 있을 수없네. 완전한 소유란 절대적인 상실을뜻할 수있으니까 말일세. “
  “ 그렇다면 그녀는 죽음으로서 자네의 애정을 더욱 자기곁에 묶어두려고 했는지도 모르지. “
  “그녀는 내가 스월드의 요양원에 찾아갔을 때 이런말을 했어.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어둠을 꿰뚫어 보는 불사조 같은 흑조가 되어 어둠을 지배하는 천사가 되고 싶다고 말일세. 어쩌면 그녀의 자살은 그 전부터 그녀 자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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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계획되고 있었을지도몰라. 물론 내게도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없지만. “
  “ 자네 판단이 맞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어떻게 그녀의 속을 전부 헤아리겠나. 피제이, 앤지가 죽어서 검은 불사조가 되고 싶다고 했지?”
  “ 그랬지. “
  “ 에스키모 말로 불사조가 뭔지 알아? 카와가닌이라고 하네. 그녀는 죽음이 아닌 죽음을 선택한 걸세. 그녀는 자네에게 있어서 검은 카와가닌 같은 존재가 된거야. “
  “ 그랬으면 좋겠네. 차라리,…..”
  거의 한 시간 반을 비행했을 때 폴은 죠오지와 앤지가 살아온 토기엑의 사슴목장을 가리키며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벌써 해는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고 산마루에 낮게 떠 있었다. 
산림평원에 통나무집이 몇 군데 떨어져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고, 붉게 타오르고 있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자 왈칵울음이 터져나와 어금니를 굳게 다물었다. 아미 두 볼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폴은 `오 주여’ 하고 몇번이고 뇌까렸다.
  폴은 사슴목장의 위를 몇 번 선회하다가 목장 옆으로 길게 뻗은 마른 풀밭에노련하게 착륙을 했다. 폴과 내가 밖으로 나오자 죠오지와 그의 동료 주민 서너 명이 다가왔다. 죠오지는 나를 보자 달려들어 두 손을 잡고 일그러진 얼굴로 잠시 말이 없었다.
 
 “ 선생님 ! “
 죠오지는 거의 외마디 소리를 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땅끝에선 노을이어른거렸다. 목장 한가운데에는 헬기가 착륙되어 있었고 서너 명의 사내들이 집 앞에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검시소에서 직원들이 왔군. “
폴이 내게 일러주었다.
  “ 네, 한 시간 전에 도착했지요. 현장 검증을 끝내고 곧 헬기로 카운티 검시소에 시신을 운반할 거예요. “
  죠오지를 따라 캐빈으로 가자 이미 앤지의 시신은 들 것에 실린 채 면포로덮혀져 있었다. 죠오지는 나와 폴을 검시관 들에게 소개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면포를 벗기고 앤지의 시신을 보는 순간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턱 아래부분에 총상으로 뚫린 자국이 뚜렷했고, 피로 얼룩진 얼굴은 이루 형용할 수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 자신이 샷건을 턱 아래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긴것이 분명했다.
  앤지의 시신이 헬기 편으로 검시소로 떠난 후 죠오지는 나와 폴을 집 안으로 안내하더니 그녀가 남긴 유언 편지를 내게 전해주었다. 겉봉에는 영문으로 된 나의 이름과 폴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고 봉투를 뜯자 백지에는 한글로 깨끗이 적어 내려간 사연들이 담겨 있었다.

 

  재만씨.


저는 이 땅끝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 역시 여자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해 그동안 스스로를 심하게 자학하는 생을 살아오면서 주위에 마음의 상처도 많이 입혔습니다.
  그러나 저의 지나친 애정욕 때문에 끊임없이 안겨졌던 고통의 시련들은유배지라고 생각하며 지내왔던 이 땅끝에서 당신과 해후를 나누기 위한 소중한 댓가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환상적인 애정욕과 열망에 대한보상이 당신의 깊은 고뇌와 갈등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죄스러움을 가눌길 없습니다. 제게 베풀어준 당신의 진실을 믿기에 죽음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제 죽음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거나 슬프다는 생각은 갖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애정을 얻기 위해 그동안 치렀던 시련을 완전히 보상받은 행복한 여인이니까요. “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리자를 버지니아에 있는 제 아빠에게 보내 주셨으면합니다. 누구의 피를 받았든 제가 거둔 유일한 자식입니다.
요양소에 있는동안 리자가 당신의 분신이었다면 아이에게는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곤 했었습니다. 부질없는 욕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망상들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더군요.
  당신에게 꼭 한가지 바라는게 있다면  모든 세상사람들의 기억에서 제 존재가 지워지더라도 당신에게만은 기억속에 영원히 살아남는 여인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를 믿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추호의 후회와 두려움이 없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어둠을 쫓는 한 줄기 빛이 되어 나를 다시 찾을 것을 확신합니다.
   당신이 저와 함께 가고 싶어한 꽃피는 캘리포니아 해변에는 함께 가지 못하더라도 이 땅끝에서 설야의 어둠을 지키며 이름 모를 야생화처럼 슬픔을 잊은 물망초처럼 백야의 여름을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기억속에 영원히머물 그 백야의 여름 말입니다.
       
                                                                     당신의 여인 연지


  편지 말미에는 리자의 아버지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는 죠오지와 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나서는 겁먹은 토끼처럼 서 있는 리자를 끌어안고 밖으로 나왔다. 목장 들판에는 사슴의 무리가 한가롭게 흩어져 있었고 나는 어둠이 밀려오는 산림평야를 바라보며 리자를 꼭 끌어안았다. 일어난 사실에 대한 충격때문에 내내 멍해있던 리자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울기 시작했다.
  “ 이렇게 착한 우리 리자를 두고 혼자가다니……”
  “ 아저씨,….”
  “ 그래, 착하지. “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지만 닦고싶지 않았다. 비로소 그토록 고대하던 고독이 홀연히 내 앞에 다가온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도 깨달음도 아니었고 이미 도착할 곳에 다다른 삭막한 쓸쓸함 그 자체였다.


  앤지의 시신을 검시소로부터 인수받아 장례를 치룬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몇몇마을 주민들과 함께 그녀를 토기엑의 조그마한 공원묘지에 안장했다.
  리자를 데리고 폴과 함께 세스나기로 앵커리지에  다시 돌아와 자동차로 폴의 집에 도착했을 때 자넷트가 집 앞에 캠퍼를 주차해 놓고 그녀의 아들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피제이 ! .”
  “ 자넷, 여기까지 오셨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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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례를 치루느라 고생들 많으셨죠. 죠오지와 통화를  했더니 이미 떠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리로 왔지요. 피제이, 어차피 당신은 알라스카를 떠나야지요. “
  “ 그래야겠지요. “
  “ 그럼 함께 지금 저 캠퍼로 떠나시는게 어때요? 당신은 리자를 아빠에게 데려다 줘야 하잖아요.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 당신의 행선지는 버지니아이고 나의 행선지는 미시시피. “
  “ 일주일이나 걸리는 긴 여행인데. “
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우물쭈물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 그럽시다. “
  “ 캐나다 국경만 넘어서면 여행하기는 비교적 안전해요. 이틀 후면 캐나다를 통과할 수 있어요. “
  “ 폴, 나는 지금 리자를 데리고 자넷과 함께 바로 떠나겠네. “
  “피제이 자네 기분은 이해하지만 어찌 이렇게 쫓기듯이 떠날려고 해. “
  “아니야 , 차라리 지금 떠나는게 나을것 같아.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지금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
  폴과 스지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잠시 멍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피제이, 어떻게 이럴수가,….”
  스지는 나의 손을 잡았다.
  “ 스지, 이런 식으로 떠나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지금은 더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아요. 이해하죠? 정리가 되는데로 연락하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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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지를 힘껏 껴안았다.
  “ 정말 고마웠어요. 스지. “
 “ 피제이,…..”
나는 가방과 소지품을 자넷트의 캠퍼에 옮겨 싣고 리자를 먼저 올려 보냈다.
폴은 선뜻 말문을 열지 못한 채 나의 어깨를 잡더니 힘껏 포옹을 했다.
  “ 피제이 행운을 빌겠어. 앤지는 어둠 속에서 빛을 그리는 검은 불사조가
되어 자네를 언제나 기다리고있을 걸세. 다시 찾아주게. “
  “ 그래, 꼭 그럴거야. “
내가 입술을 깨물며 캠퍼에 올랐다. 그리고는 폴에게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꼿꼿이 자세를 굳힌 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앵커리지 시내를 벗어나 캐나다 국경으로 향하는 도로에 들어설 때까지 자넷트와는 아무런 대화도 오고가지 않았다. 
뒷 자리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자넷트의 아들과 리자가 다정스럽게 나란히 앉아 벌써 친구가 된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넷트도 힐끗 뒷 자리를 돌아보고 나서 나를 향하여 쓸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자넷. “
 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피제이, 얘기해 보세요. “
  “ 북극을 떠난 단풍은 지금 어디쯤 머물고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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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마 삼일 후면 우리는 단풍을 따라 잡을 거예요. “
  머리속에선 알라스카의 매서운 바람이 아직도 일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나와 앤지가 이미 머물지 않는 알라스카에는 봄도 오고 다시 꽃도 필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눈 내리는 겨울도 오리라.
  하늘은 낮게 깔려 있었고 곧 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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