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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땅끝에 선 연인

Views 538 Votes 0 2015.12.05 04: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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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끝에 선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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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바에서 악사들의 섹스폰과 기타연주를 들으며 잠시 빌리와 마주앉아 자넷트를 만났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으려니 웨이츄레스가 앵커리지의 폴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알려 주었다.
“ 폴 ? 반가워, 그동안 어떻게 지녔어 ? “
“ 그럭저럭 지낼만해. 자주 연락 못해서 미안하군 그래. “
“ 아무튼 지낼만 하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말일세, 문제가 좀 생겼어. 그동안 자네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앤지가 우리집에 여러 차례 찾아오기도 했고 밖에서 그녀를 만나기도 했는데 그녀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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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의 말투는 평소 때와는 달리 무겁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반사적으로 나는 혹시 그녀와 죠오지 사이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 혹, 죠오지하고 무슨 일이라도 있나 ? “
“ 죠오지가 많이 참고 있는것 같아. 그녀를 달래며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고
애를 쓰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어려운것 같아. 그동안 계속 나한테
자네의 행방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고 간청해 왔지만 계속 그녀를 따돌렸지.
그러니까 이젠 아예 나에게 협박까지 하고 나서는 거야. 자살하고 말겠다고
말일세. 그래서 그녀에게 자네 행방을 알려주고 말았어. 분명히 자네에게
연락하고 찾아갈테니 놀라지 말고 그녀를 만나주게. 문제는 앤지의 우울증세가
점점 깊어지는 것같아. 그녀를 따뜻하게 대해주면 그녀에게는 무엇보다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거야. 피제이 내말 이해하겠지 ? “
“ 잘 알았어. 아무튼 나 때문에 자네까지 마음고생 시켜서 미안해. “
“ 아니야, 난 그저 자네와 앤지가 걱정될 뿐이야. 의논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내게 연락줘. “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왔으나 빌리에게는 앤지가 나를 방문할 것이라는
내용만 전해주었을 뿐 그녀의 우울증이나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말하지 않았다.
빌리의 반응은 앤지가 올 수도 있는 당연한 사이가 아니냐는 평범한 것이었다.

  폴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대하고 염려했던대로 다음날 일찍 앤지는 내게        
전화하여 이렇다할 설명도 없이 그녀의 딸 리자를 데리고 비행기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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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편으로 델타를 향해 출발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왕에 올 바에는
비행기 편으로 페어뱅크에 와서 안전하게 버스를 타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막무가내로 자기가 직접 운전하며 여행을 하겠다고 고집했다.
  나는 북상할수록 기후를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하다고 만류했으나 한국
에서의 지난날과는 달리 그녀의 고집을 누그러뜨릴 수가 없었다.
할수 없이 여행 도중 휴게소를  들를 때마다 전화 연락을 해달라고
당부한 다음 온 종일 창밖을 쳐다보며 보내야만 했다.
  그녀는 당부한대로 휴게소에 들려  전화를 주었고 나는 그녀와 두 번째
통화를 했을때 톰과 상의하여 그녀가 마지막으로 들려야 할 휴게소의
위치를 알려주고 그곳에서 톰의 안내를 받아 함께 오도록 했다. 톰은 나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는 픽업트럭을 몰고 앤지와 약속된 휴게소를
향해 출발했다. 다행히도 날씨는  눈이 오거나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톰의 안내를 받아 자동차를 운전하고 델타에 도착했을 무렵
이미 산림평야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녀가 도착했다는 톰의 전갈을 받고 밖으로 나가자 어둠 속에서 리자의
손을 잡고 있는 수척하고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목이 메어 말문이 막혀버렸고 그녀는 나를 부등켜 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녀의 채취를 느끼는 순간 전신을 감싸고 있던 긴장이
무너져 내렸다. 뜨거운 전율이 온몸을 조용히 감쌌다. 그것은 오랫동안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응어리진 감정이 한꺼번에 와해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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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왔어 그래, 잘왔어. 보고싶기도 했고, 우선 여장부터 풀고 샤워하고나서
함께 식사하지. “
“ 재만씨 만난다는 생각에 지난 밤에는 뜬 눈으로 밤을 설쳤어요. “
그녀는 환히 웃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촉촉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녀와
리자를 미리 마련해 놓은 객실로 안내했다. 모텔방에 들어서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여행용 가방을 침대 위에 올려놓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어떻게 이렇게 외진 곳에서 지내실 결심을 하셨어요. 잠시 머물다 떠날
여행도 아니데. “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몹시 서글픈 표정을 지었으나 나는 오히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항상 그런 여자였다.
“ 괜찮아. 이제는 지낼만 해. “
“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렇게 활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분이 마치 귀양살이
를 하는 것만 같군요. “
“ 그렇지 않아. 그런대로 뜻있는 생활을 하고 있어. 나에게는 모두가 귀중한
순간들이 될거야. 어서 더운 물로 샤워나 하지. 잠시후에 다시 올테니. “
나는 리자를 들어 올리며 볼에 입을 맞추었다.
“ 우리 꼬마 아가씨, 엄마 따라 오느라고 고생 많았구나. 아저씨 기억하지 ? “
“ 네. “
“ 제가 파커와 스노우 부츠를 준비해 가지고 왔어요. 아무래도 이곳에서
겨울을 지내시려면 필요할 거예요. “
연지는 트렁크에서 내게 줄 파커와 스노우 부츠를 꺼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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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맙군, 그렇잖아도 며칠 내로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
“ 그리고 스모크 샐먼(슬라이스하여 훈을 뜬 연어)을 좀 가져왔어요. 제가 손수
만들어 두었던 거예요. 술안주에도 좋고 군것질 하기도 좋을 것 같아서. “
이번에는 포장지를 몇 겹이나 정성스럽게 싼 봉지를 꺼내 놓았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대학에 진학하여 나의 하숙집을 찾아오던 옛 기억들을 되살렸다.
그것은 짜릿하고 아련한 느낌이었고, 동시에 서글픔이기도 했다.
그날 저녁 앤지가 바에 나타나자 빌리와 순이 그리고 나와 친해진 악사들,단골
손님인 델타나들이 따뜻한 박수로 맞이해주며 그녀에게 인사를 청했고
건배를 했다.
  뜻밖으로 즐거워 하는 앤지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티없이 맑고 예뻤던 그녀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포근한 회상에 잠겼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설레임보단 두려움이 앞섰다.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바뀐 그녀를 다시 돌려 보내고
나면 폴의 말대로 그녀는 또 다시 깊은 우울증에 빠져 술과 외로움으로 나날을
보낼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녀와 순이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다정하게 카운터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고 빌리의 부부 그리고 나와앤지는 서로 상대방의 파트너를 바꾸어
디스코를 즐기기도 하며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피제이, 자네 옛날에 정말 멋진 연인을 두었었군. 부럽기도 하지만 이 얼마나
로맨틱한 만남인가. 북극 알라스카에서 다시 돌이켜 보는 옛사랑 옛추억 말일세. “
빌리는 술잔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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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봐 주어 고맙네. 하지만 이젠 앤지가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지켜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야. “
“ 물론 한국인들의 경직된 도덕관념 잘 알고 있네. 그러나 방종이나 퇴폐
가 아닌 이상 인간관계는 순리로 풀어야 감정적인 피해가 없는 법일세.
도덕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앤지를 경계만 한다면 앤지의 우울증은 심각한
상태에 이를지도 모르지 않겠나. “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폴과 그가 그정도까지는
서로 얘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하니 별로 기분 나쁜일도
아니였다.
“ 미안하네. 자네 사생활의 일면을 들추는 것 같아서. 하지만 이미 폴은
나에게 자네를 염려하는 뜻에서 앤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 주었어. “
“ 괜찮아. 오히려 그렇게들 마음 써주니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네. “
“ 이건 폴이나 나의 진심일세. 자네가 앤지를 아직도 그 옛날의 연인으로
생각한다면 경직된 태도를 버리고 슬기롭게 대처하게. “
“ 슬기롭게 대처하다니 ? “
“ 이를테면 말이야. 그녀에게 지난날을 생각해서라도 좀더 부드럽게 대해
주란 말일세. 그러면 그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삶에 대한
피해 의식을 줄일 수도 있을거야. 가까이 있건 멀리 떨어져 있건 자네가 그녀와
자주 접촉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그녀의 굳게 닫힌 내면의 문을 활짝 열고
외부와 융화할수 있는 포용력을 갖도록 도와주는 거야. 이 일은 의사도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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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가 애정을 가지고 어느정도 희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가능할 수
있다고 믿네. “
  빌리의 진지한 조언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내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이 그녀를 위해 희생을 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쌍방 모두가 자신을 지킬수 없는 불행을 자초하고 말
것이라는 판단이 앞섰다.
“ 자네의 의견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그러나 그녀를 위해 자네 말대로
내가 희생적인 노력을기울였다고 가정해 보자구. 그렇게 되면 과거보다 더 큰
불행이 초래될지도 몰라. 어느 한 쪽이 희생해서 양쪽이 모두행복해질 수있다면
그보다 바람직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지난 날의 애정에 사로잡혀 환상에 쫒기다
보면 둘 다 불행해질 수도 있으니까. 나도 그녀를 돕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간절하다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고민해 보아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능력과 방법에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어. 이것이 문제야. 폴이나 자네는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어. 자네들의 말대로 그녀를 과거의 애인이라고 지난
날의 추억이나 되씹으며 가까이 지낸다고 해보게. 결국 유부남 유부녀의 불륜
으로 빠지기 십상이고 그 결과는 자명한 것일세. 더욱이 우울증세로 자제력을
잃은 그녀가 나의 모든것을 송두리째 소유한다고 해서 그리 쉽게 정상으로
회복한다고 기대 하기는 어렵네. 물론 방관하고 있지만은 않겠지만 그녀를
도울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내. 아무튼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야. “
  자리를 털고 카운터에 나란히 앉아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앤지와 순이에게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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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여행으로  피로할 텐데 쉬는게 좋을 것 같군. “
“ 미스터 박, 내일 앤지를 우리집에 데려다 주세요. 돌아갈 때까지 우리집에
머물도록 말예요. “
“ 본인이 좋다면 좋은 생각입니다. “
“ 저는 이곳에 이렇게 좋은 친구분들이 계신줄 모르고 재만씨가 고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줄곧 염려했어요. “
앤지는 술에 취한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때였다. 섹스폰을 연주하던 악사가 좌중의 손님들을 향하여 앤지의 방문을
소개하며 분위기를 바꾸어 갔다.
“ 여러분 ! 오늘 이곳 에버그린 클럽에 특별한 손님이 와 계십니다. 이분은
앵커리지에서 오신 미모의 한국계 숙녀이자 여러분이 항상 아껴주시는
에버그린의 지배인으로 있는 피제이의 오랜 친구이자 옛 연인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델타에서 해후하게 된 것을 우리 모두 다시한번 축하합시다. ! “
악사의 소개와 아울러 좌중에는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 소개드린 숙녀분의 이름은 앤지입니다. “
그러자 앤지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좌중을 향해 인사를
보냈다. 그러나 악사의 소개는 여기서 끝난것이 아니었다.
“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고적대의 지휘자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들리는
바에 의하면 노래솜씨도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숙녀에게
노래 한 곡을 부탁하는게 어떻겠습니까 ? “
좌중에서는 또 한 차례 열렬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 역시 어리둥절했다.
악사가 앤지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소개할 수 있었다면 빌리가 아니고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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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한 일이었고 나는 빌리에게 그녀와의 관계를 말해준 적은 있지만 그녀가
고적대 지휘자였다는 것과 노래솜씨가 좋다느니 하는 등의 자세한 내용을
들려준적은 없었다. 그는 폴과의 대화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
“ 앤지! 부탁 드립니다. 무대로 나와 주십시요. “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고 눈치였다. 나는 이쯤
되고 보니 굳이 거부해야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한 번 쯤은 기꺼이 받아
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내가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녀는 악사들이
있는 무대로 나갔다.
“ 델타에 오신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 밤이 영원한 기억의 순간으로
남게되길 바랍니다. “
악사는 그녀에게 핸드 마이크를 넘겨 주었다.
그녀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오 대니 보이’를 진지하게 불렀다. 그녀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모두들 의외라는 듯 한결같 이 앵콜송을 요청했고 그녀는 케니
로저스의 `마이레이디’를 한 곡 더 불렀다.
빌리와 톰은 그녀가 노래하는 모습을 진지하게 경청하며 의외라는 듯 감격
스러워했다.
그녀는 무대를 내려와 빌리 부부와 톰에게 다가가 고맙다는 인사를 깍듯이 했고
나는 그녀가 자리에서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녀를
데리고 바를 나왔다.
어두운 숲속에는 바람 스치는 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고 차가운 밤공기가
살갗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나의 몸에 깊숙이 기대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중얼
거림이라기보다는 바람소리에 가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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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다시 만나고 난 후부터
미국 땅에서 억세게 살아온 내 자신이 얼마나 허상이었나 하는 허무한 생각
밖에 없어요. 자신의 참모습이 그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몹시 밉기도 하고요.
차라리 당신의 무릎아래 쓰러져 버림을 받는 한이 있었더라도 당신과 헤어
졌던 일이 한없이 후회스럽기도 하구요. “
나는 한동안 밤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으로 밀려드는 아픔을 쓸어버리려고
애썼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뒷뜨락을 지나 모텔 방으로 항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 우리 서로에게는 아직도 많은 날들이 남아있어.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숱한
날들의 일이 한 시야와 하나의 기억이라는 그릇에 불과해요. 사람들은 길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치 긴 인생을 살아갈 듯이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니죠. 그렇다면 저는 그 숱한 날들을 맞이하면서 버리지 못하는 추억만을
씹으며 살고 싶지는 않아요. 예전엔  당신을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우연은 두 세번씩 이어지는 관계를 만들어 주지 않아요. 예전에 내가
당신에게 다가갔듯이 그렇게 당신이 내게 다가와 주세요. 땅끝까지 밀려
올 수밖에 없는 우리의 만남이 운명이 아니면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세요. “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두 팔로 나의 허리를 힘있게 감싸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를 데리고 모텔 방으로 돌아왔을때 그녀의 딸 리자는 한쪽 침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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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잠들어 있었다. 인형처럼 예쁜 리자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자 지난날
그녀의 모습들이 영상처럼 떠오르며 스쳐갔다.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감정때문에 그녀를 끌어안고 깊숙이 입을 맞췄다. 그녀는 내등을 힘껏 껴안으며
나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한동안 포옹을 풀지 않았다. 알라스카의 어느곳에
깊이 파묻혀 그녀와 함께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그 깊은 생각
끝에는 우람한 몸집에 선량한 얼굴을 한 죠오지가 있었다.
“ 연지, 오늘 이곳에서 쉬고 내일 빌리네 집으로 옮기지. 그곳에서 돌아갈 때까지
지내면서 우리에게는 소중한 날들을 보내는 것이 뜻이 있을거 같애. 연지를
만난 커다란 기쁨 뒤에 마음 아픈 상처를 남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군. “
“ 그러나 당신은 베델에 있다가 나를 따돌리고 이곳에 왔잖아요. 뒤에 남은
사람의 상처는 헤아려 보셨나요. 다시한번 나를 따돌리고 잠적하신다면
저는 미쳐버릴 거예요. 재만씨, 제뜻을 조금만 이해해 주세요. “
그녀의 말에 나는 나까야먀 진따로를 생각하며 씁쓸함과 함께 자신이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것만이
그녀와의 현실을 떳떳하게 맞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더 이상 주저할 것이 없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침실로 이끌었다. 침대위에
마주 앉아 그녀의 자켓을 벗기고나서 속옷을 끌어 내렸다. 그녀의 하얀 살결이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났다. 풍만한 젖가슴과 탄력있는 젖무덤을 보는 순간,
한줄기 전율이 전신을 자극해왔다. 그것은 그동안 내면에 쌓이고 축적되었던
외로움이 일시에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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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으니 이젠 더 바랄 것이 없어요 . “
그녀는 나를 자리에 눕히고 조심스럽게 나의 옷을 벗겨 내려갔다. 그녀는 입술로
나의 얼굴을 더듬으며 이내 깊숙히 휘감아 들어왔다. 문득 서울의 하숙방에서
가졌던 그녀와의 첫 경험을 기억해 내곤 그녀의 얼굴을 더듬어 내려갔다.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거친 숨결에선 술냄새가 풍겼다. 이미 그녀의 눈길은
깊은 욕망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연지, 기억하고 있어 ? 서울에서 처음으로 연지와 내가 하나가 되었던
그때 말이야. “
“ 당신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나에 대한 추억 중 그것이 중요한 순간인가요? “
“ 물론이지. 내가 연지의 옷을 다 벗겼을 때 조금도 거부반응이 없었지. 막상
옷을 다 벗기고 나니까 연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안절부절 했었지. 아마도…”
“ 이제 솔직히 말하면 사실 그때 당신으로부터 그걸 바랬어요. 나의 모든것을 당신
에게 스스럼없이 보여줄 수 있다고 자신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에게만은 아름답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었어요.
그러나 생각외로 나의 몸을 음미하는 당신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수치심이
앞섰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감히 그런 용기가 났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해보지는 않았어. 내심 연지의 모든것을 보고 싶었던
욕망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야. “
숲속을 스쳐가는 바람소리가 창문의 유리창을 흔들며 멀리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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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우리의 의식은 하얀 망각의 속으로 깊이 빠져 들었고 끝없는 욕망의
갈증으로 온 몸은 산산히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한 차례 뜨겁고 격렬한
열정이 지나가고나자 그녀는 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연지를 꼭 끌어안고 그동안 우리 곁을 스쳐갔던 사랑과 슬픔을 하나하나
헤아렸다. 그리고 밤은 그런 깊이로 우리의 가슴속에 다가왔다.
  다음 날부터 앤지는 빌리의 집으로 숙소를 옮겼으나 순이가 직장에 나가
있는 시간이면 내가 일하고 있는 모텔에 오아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주말을 지내고 나서 빌리와 이미 약속한대로 캐리브 사냥을 가기 위해
삼 일 동안 휴가를 마련했다. 물론 사냥 안내는 톰이 맡았고 헬기는 빌리가
페어뱅크로에서 대여해 오도록 주선했다.함께 동반하게된 앤지는 담담한
태도였다.
  모텔 뒷편에 있는 숲속의 작은 빈터에 헬기가 착륙하는대로 대기하고 있던
일행은 사냥 장비와 캠핑 도구를 적재한 다음 이내 탑승하고 캠핑 예정 지역으로
떠났다. 헬기가 고공으로 상승하여 비행 방향을 잡았을 때 나는 비로소 광활
하고 검푸른 델타평원을 내려다 보며 새삼스럽게 감탄을 했다. 저 넓고 처녀
림같은 산림평야 속에서 사슴의 무리들이 어느 길목을 통과한다고 예측하기는
도저히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톰은 사냥 안내만은 자신있다고 장담을 했다.
  사실 나는 사냥이 아니라 산림평원을 관망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헬기는 동북쪽 45도 방향으로 비행을 계속했다.
“ 빌리,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정확히 어디라고 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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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종석 옆에 앚아 지도를 펼치고 있는 빌리에게 물었다.
“ 페어뱅크에서 동쪽으로 유칸 브리티시 중간 지역에 있는 캐나다 국경과
인접한 곳이 되겠지. 우리가 캠프를 설치할 곳은 톰이 선정을 하게 될 걸세.”
빌리는 나에게 지도를 건네주며 일행이 찾아가고 있는 위치를 가리켰다.
“ 시기적으로 캐리브의 이동을 포착하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드는데…”
앤지가 내 옆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북쪽에서 남하하다가 잔류했던 사슴들이
통과하기도 하죠. “
이번에는 조종사가 앤지의 말에 대꾸했다.
“ 염려들 마시라니까. 아직도 유칸 브리티시를 통과하지 않은 캐리브들이 아마
수천 마리가 넘을 걸. “
뒷자리에 앚아있던 톰이 자신있다는 듯 말했다.
“ 알았어. 톰 자네만 믿고 떠난 거니까 만약 우리가 예정한 캠핑기간에
캐리브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네 혼자서 남아 있으라구. 내년 봄에 캐리브들이
다시 북쪽으로 올라올 때까지 말일세. “
빌리가 익살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 사냥 떠났다 하면 내 모가지를 옭아매려고 한다니까. 사실은 캐리브 사냥을
제대로 하려면 적어도 일 주일 정도는 예정하고 사냥을 떠나야 하는 건데. “
“ 그야 피제이와 앤지의 사정이 여의치 않은데 어떡하나. 그리고 이제는 밤이면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데 경험도 없는 피제이와 앤지가 어떻게 일주일 씩이나
야영을 견딜 수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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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긴 그래. 그렇다면 북쪽에에서부터 캐리브들이 이동하는 것을 비행
정찰 하는 것도 좋은데. “
“ 그럴 바에는 아예 산림경찰국의 정찰대를 동원하는게 좋을 뻔 했군. “
헬기 조종사가 한 마디 거들자 모두를 한바탕 웃었고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 아직은 미처 남하하지 않은 사슴 무리들이 계속 이동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시기에 유칸 브리티시를 통과하는 사슴들의 이동 속도는 굉장히
빠릅니다. 민첩하게 행동해야 할 거예요. “
“ 그런 왜 그렇지요 ? “
“ 계절적으로 볼 때 추위가 닥쳐오는 이 지역을 빨리 벗어나서 기온이 따뜻한
남쪽으로 서식지를 옮겨야 하니까요. “
“ 그렇기도 하지만 그놈들은 원래 역마살이 있어서 옮겨 다니며 살기를 좋아
하기 때문에 그런거라고. “
톰은 자기를 앞질러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조종사가 못마땅한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앤지와 나는 톰을 의식하며 서로 눈웃음을 주고 받았다.
델타를 떠나 사십여 분 정도 비행을 계속하고 있을때 갑자기 뒷자리의 톰이
큰 소리로 비행기의 고도를 낮추라고 조종사에게 요구했다.
“ 저기 보라구 ! 분명히 캐리브 떼가 밀려 내려 오고 있어. 어제 쯤 미리 가서
캠프를 치는 건데. 한발 늦었어. 제기랄. “
톰은 헬기의 비행방향 좌측으로 보이는 북쪽 계곡을 가리켰다.
조종사는 좌측으로 선회하며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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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창 밖으로 머리를 돌려 계곡을 내려다 보았다. 그 순간 사슴
한무리가 줄을 지어 계곡을 달려 남하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모습은 마치 영화에서 보았던 기마병의 이동처럼 질서가
정연해 보였고 장관을 이룬 산림과 그림처럼 조화를 이루었다.
“ 이 뒤 두 사람은 처음 보는 멋진 장면인데 한번 가까이 접근해 봅시다.”
톰이 조종사에게 부탁을 했다.
“ 좋아요. 한번 접근해 보지요. “
조종사는 기수를 남쪽으로 돌리며 사슴들이 밀려오는 방향으로 고도를
낮추고 저속 비행을 했다.
  잠시후 사슴들 무리가 시야에 클로즈업 되었고 전 속력으로 낙오없이
무리지어 달리는 사슴들의 뒤를 추적하듯이 조종사는 비행을 계속했다.
사슴들은 헬기의 소음에 겁을 먹었는지 경사를 이룬 숲속으로 주행 방향을
바꾸었고 순식간에 멀리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속에 남겨
두어야 할 하나의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기도 했다.
  헬기는 다시 동북 방향으로 고도를 유지하며 배행을 계속 했고 앞자리에
앉아 망원경으로 산림을 관측하던 빌리가 망원경을 나에게 넘겨주며
설명했다.
“ 우리는 동북 간 40도 내지 50도 방향으로 현재 비행하고 있어. 동쪽으로
불과 오분 내지 십분 거리에 캐나다와 국경이 있어. 우리가 캠프를 설치할
위치도 이삼십  마일 반경에 있다구. “
  나는 망원경으로 멀리 북쪽과 동쪽 산림 평야를 두루 살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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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은 비행 방향과는 정반대의 남쪽 하늘 위에 낮게 걸려 있었다.
“ 여기에 펼쳐지는 산림 평원은 동서로 뻗은 북쪽의 브룩스 산맥을 넘어
서면서 남쪽으로 형성되는 넓은 지역이야. “
  빌리는 잠시 동안 지형을 설명해 주었다.
  잠시 후에 조종사는 캠프지역을 선정할 준비를 하라고 빌리에게 일렀고
빌리는 다시 톰에게 그가 예정한 사냥터를 찾으라고 했다. 톰은 일단 비행
고도를 낯추고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산림의 상공을 선회하며 지형을 관찰
한 끝에 톰이 착륙지점을 지정한 곳은 남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룬 숲속의
계곡이었고 계곡을 흐르던 물은 거의 메말라 있었다. 헬기에서 빠져 나왔
을 때 방향 감각이 전혀 잡히질 않았고 마치 무인고도에 착륙한 느낌이었다.
  헬기에서 장비를 모두 내려놓은 다음 빌리는 조종사로부터 비상 연락용
무전기를 인수 받으며 간단히 조작법을 익혔다.
“ 이쪽에서 비상연락이 없는 한 지금부터 48시간이 지난 모래 오후 2시까지
이곳으로 와주시오. “
빌리는 조종사에게 일러주었다.
 “ 알았습니다. 여러분 즐거운 캠핑이 되길 바랍니다. “
비행기는 요란한 엔진의 소음과 함께 바람을 일으키며 서쪽 상공으로
날아갔다.
“ 빌리, 도대체 방향감각이 잡히질 않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말이야. “
나는 어두운 산림속을 살폈다.
“ 그럴만도 하지. 우리가 지금 떠 있는곳은 65도를 넘어 북회귀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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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접한 서경 143도 쯤 되는 위치라구. “
“ 빌리가 누군가. 미 육군 유격대 출신이잖아. 항상 독도법의 권위자라고
으시댄다구. 하지만 사냥하는데는,….”
톰이 으시대는 몸짓을 하며 말했다.
“ 알았어. 이 산적같은 친구야. 자네가 밀림의 왕자라 이거지 ? “
“ 암 그렇지. 잘 알면서 그래. “
톰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 두분은 만나기만 하면 입담을 나누시나 봐요. “
앤지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두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 마치 개와 고양이 같다니까요. “
톰이 대꾸하자 모두들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 그럼 누가 개고 누가 고양이란 말인가요 ? “
앤지가 다시 말꼬리를 잡았다.
“ 내가 개라구요. “
톰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자 빌리가 이내 받아 넘겼다.
“ 그러니까 자네는 말하는게 개 짖는 소리하고 똑같아. “
모두들 한바탕 웃고 말았다.

  톰의 안내로 일행은 캠프를 설치하기 시작했고 톰은 나를 도와 나와 앤지의
텐트를 별도로 설치해 주고 나서는 흡족해 했지만 앤지는 내심 계면쩍어 했다.
  계곡의 숲과 개천이 인접한 평지에 적당한 공간을 두고 두개의 텐트를 나란히
설치한 다음, 버너를 피워 커피를 끓이고 이내 취사를 시작했다. 톰과 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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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브들의 야간 이동은 거의 없지만 사냥중에는 야영을 하면서도 항상 총에는
실탄을 장진하고 안전핀을 잠근채 비상대기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취사가 끝나고 모닥불 주변에 일행이 둘러 앉아 식사를 시작하자 톰은 짧은
일정에 대해 다시한번 아쉬움을 나타냈다.
“ 캐리브 사냥을 하려면 적어도 사 오 일 정도는 야영할 작정을 해야 하는 건데.”
“ 막상 여기까지 오니까 미련이 생기는 모양이군. 아무튼 떠나기 전까지 캐리브
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자네 혼자 여기서 캐리브들이 이곳을 통과할 때까지
야영을 하라구. 우리는 델타로 돌아가서 자네로부터 소식이나 기다라고 있을
테니까. “
“ 빌리, 그만 하세요. 우리가 떠나기 전에 분명히 사슴들은 우리 앞을 통과
할 거예요. “
앤지는 넌지시 웃으며 톰과 빌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그럼요 , 아까 헬기를 타고 오면서 봤지요. “
톰은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맞장구를 쳤다.
계곡에 잿빛 어둠이 드리우면서부터 싸늘하게 기온이 내러가고 있었고
일행은 숲속의 죽은 고목을 주워모아 이미 땔감도 넉넉히 마련해 놓았다.
  밤이 되자 모두들 파커를 걸치고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 따스한
마음과 체온을 한껏 돋구었다.
 빌리와 톰은 캔맥주를 마시면서 군생활과 사냥군으로서 체험했던  신변
잡기들을 줄곧 늘어놓았고 나와 앤지는 팔짱을 끼고 서로 기대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164
“빌리, 캐리브들을 잡으면 우선 한마리는 목을 잘라 피제이에게 기념으로
박제를 만들어 줘야지. “
톰이 느닷없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 톰, 제발 그만하세요. 징그러워요. “
앤지가 몸을 움추리며 나의 턱 밑에 얼굴을 묻었다.
“ 글쎄 말입니다. 이 친구 캐리브를 못잡게 될지도 모르는데 미리부터
으시댄다니까요. “
빌리는 캔맥주를 입술에 기울였다.
“ 아니예요. 잘생긴 놈으로 박제하면 멋진 선물이 될거라구요. 그리고 다음에
늑대를 잡으면 앤지에게 코트를 만들어 드리지요. “
톰은 빌리의 말에는 개의치않고 앤지에게 말했다.
“ 그래요. 기대하겠어요. “
“ 피제이. 먼저 텐트에 들어가서 눈을 좀 붙이라구. 나는 톰과 교대로 자면서
불침번을 설테니까. “
“ 두분이 먼저 주무세요. 우리가 불침번을 설께요 . “
앤지가 사양하자 톰은 나와 그녀가 먼저 눈을 붙일것을 강하게 권유했다.
모닥불의 불길이 텐트안에 어른거렸고 앤지는 휴대용 랜턴으로 불을 밝혔다.
“ 빌리가 준비를 단단히 해가지고 왔더군요. 우리를 위해서. “
앤지는 에어 매트 위에 깔린 감촉이 푹신한 오리털 군용침낭을 가지런히
매만졌다.
“ 피곤하지 않아 ? “
나는 침낭 위에 그대로 주저앉으며 몸을 눕혔다. 그리고는
                                                                                                                                                     165
그녀의 팔을 잡아끌며 그녀를 내 옆에 나란히 눕게했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어두운 땅 속 깊이 묻히고 있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 앤지, 이 숲속에다 땅을 파서 움막이라도 짓고 우리가 살 수 있다면,.. “
나는 말을 맺지 못했다. 무슨 푸념인지 아니면 독백인지 모르게 갑자기 감상속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언제나 그녀에 대해 버릴 수
없는 슬픈 환상이기도 했다.
“ 차라리 저는 당신의 가슴 속에 내가 머무를 수 있는 작은 움막을 짓고 싶어요.
바람소리가 들려와도 그것은 당신의 숨결일테니까요. “
그녀는 나의 귓전에서 나직이 속삭이며 한 손으로 나의 가슴을 더듬어 내려갔다.
그녀를 눕히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똑한 코, 맑은피부 그리고 언제나 꿈꾸었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과 뺨과 싸늘하고 시원한
목덜미에 입술을 천천히 가져다 댔다. 미치도록 그리운 느낌이었다. 우리는 힘껏
껴안고 미친듯이 뒹굴었다.
“ 아직도 저는 꿈 많은 여고생 같아요. “
“ 아니야. 십년전 우리 가슴속에 지어놓은 움막집은 내가 허물어 버렸던거야. “
“ 괴로워하지 마세요. 슬픔은 자기 몫이고 기쁨은 사랑하는 사람의 몫이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결국 이렇게 땅끝에서 사랑의 형벌을 받고 있는지도 몰라요. “
“그래서 우리가 유형지와 같은 이 북극땅에서 다시 만났겠지. “
                       


                                                                                                                   166
  나와 앤지는 함께 부둥켜안고 조용히 흐느꼈다. 밖에서는 모닥불 속에서 마른
나무가지들이 불똥을 튀기며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빌리가 서툰 솜씨로 통기타를
치면서  칸추리송을 흥얼대며 부르는 소리가 적막하고 어두운 숲속에 나직이
울려 퍼졌다.

  앤지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나는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 밖에 전혀 인기척이 없어요. 모닥불도 꺼지고. “
  “ 그래 ? 불침번을 교대로 서겠다더니 이 친구들 술에 곯아 떨어진 모야이야. “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여기 있어요. “
  앤지는 내게 총을 들어 내밀었다.
  “ 숲속에 뭐가 있을라구. “
  “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캠프를 치고 있는 걸 숲속의 짐승들은
다 지켜보고 있다구요. “
  나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며 그녀가 내민 장총을
재빨리 받아들었다. 그녀 역시 총을 들고 나를 따라 나왔다.
  모닥불은 이미 다 사그라져 불씨만 남아 있을 뿐 톰과 빌리는 보이지 않았고
그들의 텐트에는 불이 꺼진 채 주위는 짙은 어둠과 가슴을 압박해 오는 듯한
침묵 뿐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톰과 빌리의 텐트로 다가갔다. 그들의 텐트 앞에 이르자
그녀와 나는 서로 마주 쳐다보며 웃고 말았다.
                                                                                                                                  167
그들은 술에 취해 코를 골아대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두사람 모두가 배짱 한번 좋군. “
  “ 호랑이가 물어가도 모르겠어요. “
  “ 그럼 우리가 불을 피우고 앉아 있지. “
  “ 지금 몇시나 됐는지 시계좀 보세요. “
  “ 여섯시라구. “
  “ 숲속에 햇볕이 들려면 열시가 넘어야 된다구요, “
  나와 앤지는 다시 모닥불을 피우고 나란히 어깨를 기대고 앉아 살갗으로
스며드는 새벽의 차가운 기운을 음미했다.
  앤지와 내가 커피를 끓이고 아침식사 준비를다 마친 후 빌리와 톰을 깨우자
그들은 그제서야 일어나 눈을 부비며 텐트에서 나왔다.
  “ 깨우지 않았으면 두 사람 모두 내일 아침에 일어날 작정이였어 ? “
  나는 모닥불 곁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쳐다보며 농담을 던졌다.
  둘은 서로 마주보며 상대방에 대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자네가 피제이와 교대했어 ? “
  빌리가 먼저 톰에게 물었다.
  “ 아니, 빌리가 피제이와 교대한 거 아니야 ? 피제이하고 앤지는 깨우지
말라고 해놓고서,…. “
  “ 톰이 불침번 서다가 나를 깨우기로 했잖아. 그런데 나를 왜 안깨웠어 ? “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깨우니까 알았다고 대답했잖아. 그래서
나는 그냥 누워 버렸지. “
                                             
                                                                                                                                           168
“ 내가 언제 그랬어 ? “
“ 아이구 ! 이 친구 또 잠꼬대 하네. “
톰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몸을 비비꼬는 시늉을 했다.
“ 아니 그러면 내가 일어나는 걸 확인하고 자리에 누웠어야 하잖아. “
“ 두분  그만 하세요. 우리가 일어났으면 된 거 아녜요. 어서 커피나 한잔씩
드세요. “
빌리와 톰은 서로 마주보며 계면쩍어 하더니 어처구니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틀밤이 지나도 캐리브 사슴떼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둠이 걷히고 아침이
밝아오자 톰은 빌리와 마주앉아 모닥불을 쪼이며 하품을 하고나서 투덜거렸다.
“ 빌어먹을, 이놈의 사슴들이 전부 다른길로 들어섰나. “
“ 톰, 김빠진다. 캐리브들이 냄새 맡고 방향을 다른데로 돌린것이 분명해. 아니야,
어쩌면 그저께 헬기 타고 오면서 보았던 사슴떼가 마지막으로 통과한 무리
일지도 몰라. “
“ 아니야 빌리, 나의 사냥 길잡이는 이십 년간 빗나간적이 없다구. “
그들이 입씨름을 하고 있을 때 나와 앤지는 텐트 밖으로 나갔다.
두사람은 역시 지난 밤에도 술을 많이 마셨는지 맥풀린 눈빛으로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 헬기가 올 때까지 사슴들이 통과하지 않으면 그냥 돌아 갈 수밖에 없잖아요.
너무 안타깝게 기다리지 마세요. “
앤지가 위로하듯 말했다.
                                                                                                                                        169
“ 빌리, 무전 연락을 해서 우리가 캐리브를 잡을 때까지 기다리라고해. “
“ 앤지와 피제이의 일정 때문에 안돼. 헬기가 올 때까지 사슴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톰, 자네 혼자 이곳에 남아서 사슴들을 기다리라구. “
늦은 아침식사를 끝내고 열두 시가 가까워오자 우리는 모두 사슴떼가 나타
나리라는 기대를 포기한 채 헬기가 올때까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빌리는 시계를 보며 헬기 도착 시간이 두 시간 정도 남았으니 한 시간 쯤
텐트안에서 잠을 자든지 휴식을 취하고 나서 짐을 꾸리자고 제안하며 예정
시간에 헬기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한 무전교신을 해두었다.
  낙담을 한 듯 톰만 모닥불 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나와 앤지, 그리고
빌리는 텐트로 들어갔다.
  텐트 안에 누워서 삼십 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한 순간에 지축을 흔드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캐리브 사슴떼의 발굽소리가
덮쳐오는 소리였다.
“ 캐리브다아 ! 총들고 밖으로 나와 ! “
  당황한 톰의 외침이 사슴떼의 발굽소리에 묻혀 귓전에 울려왔고 사슴떼는
안개같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캠프를 향해 노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톰은 텐트 안에서 총을 들고 나온 빌리와 함께 몸을 굴리며 피신하기에
급급했고 그제서야 밖으로 나온 앤지와 나는 밀어닥치는 사슴떼를 보고
몸을 피할 여유도 없이 서로 끌어안고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앤지를
끌어안고 구르다가 저만치 자빠지고 말았다. 정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빌리와
톰이 조준도 하지않고 쏘아대는 총성이 숲속에 연달아 울려퍼졌고
                 
                                                                                                                           170
사슴떼의 발굽 아래 두개의 텐트를 설치한 캠프는 쑥밭이 되고 말았다.
  혼비백산 한 채 총질을 해대는 빌리와 톰은 잠시 멀리 계곡을 따라 밀려가는
사슴 떼의 후미를 멀뚱하니 바라보다가 사슴들이 몇군데 나자빠진 것을
발견하고는 산적들처럼 너털웃음을 웃어제켰다.
  “ 피제이가 다쳤어요 ! 돌봐주세요 !
  앤지가 외치며 계곡의 돌멩이 바닥에 나뒹굴어진 나를 향해 달려왔고,
그제서야 빌리와 톰은 번뜩 제정신이 돌아온듯 나와 앤지 쪽으로 뛰어왔다.
앤지는 나의 어깨를 부축하고 끌어안으며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돌에
부딪친 이마가 피멍이든 나의 몰골을 보고 울상이 되어버렸다.
  “재만씨 어때요 ! “
  “ 톰 빨리 구급세트를 가져와 ! “
  빌리가 소리치자 톰은 허둥대며 텐트로 달려갔다. 그러나 사슴떼의 발굽에
박살이 나버린 캠프를 보고 그는 총을 팽개치며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 빌어먹을 사슴 사냥은 커녕 사슴에게 밟혀 죽을 뻔 했잖아 .내가 뭐라고했어.
키리브들이 나타난다고 했잖아. 타잔을 뭘로 보는 거야. “
  그는 배낭에서 구급세트를 찾아들고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의식을 회복하고 일어나려고 해보았으나 온몸이 저려왔고 그제서야
모두들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 재만씨 괜찮으세요 ? “
  나는 앤지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으며 빌리와 톰을 쳐다 보았다.
                                                                                                                                         171
“ 사슴 잡았어 ? “
“ 네 마리나 잡았다구 ! “
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 당신들은 사람이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총질만 하고 있나요 ? “
앤지가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핀잔을 주자 그들은 머쓱해진 표정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 앤지, 미안해요. 우리도 미처 경황이 없었어요. “
빌리가 사과를 했다.
“ 그래요. 나도 사냥 길잡이 이십년 만에 오늘같은 날은 처음 이었어요. “
톰 역시 미안하다는 태도였다.
“ 앤지, 그만해. 나 멀쩡하다고. 총 한방 제대로 못 쏘아 본게 아쉽군. “
“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거야. “
톰이 대꾸하자 앤지가 발끈했다.
“ 그러다가 다음에는 사슴떼에 밟혀 죽을려구요. “
“ 떠날 채비나 하자구. 피제이 일어날 수 있지 ? “
“ 빌리, 걱정하지 말게 . 지금부터 떠날 준비나 서두르자구. “
미안해하는 빌리에게 웃어보였다.
앤지는 구급세트에서 거즈를 꺼내어 나의 입술과 이마를 닦아주고 약을
발라 주었다.
“ 재만씨가 큰 변을 당하지는 않았나해서 얼마나 가슴 조였는지 몰라요. “
“ 앤지가 무사하니 다행이군. 나야 사슴떼의 발밑에 깔려 죽어도
                                                                                                                                        172
앤지 곁에서 눈을 감는다면 행복하다구. “
“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
그녀는 나를 와락 끌어 안았다. 나는 맥을 놓은 채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우리는 땅 끝에서 다시 만난 사람들이예요. 더 이상 갈곳도 없는 사람들
이라구요. “
그녀는 나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면서 내 뺨을 그녀의 얼굴에 갖다댔다.
“ 아니야, 우리는 하늘 끝까지라도 함께 가야할 사람들이야. “
앤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 보았다.
“ 사랑해요. “
입술이 겹쳐지면서  우리는 서로 상대방을 열렬히 키스하기 시작했다.
빌리와 톰은 흩어진 장비를 정리하다말고 앤지와 내가 키스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멀리 산림평원 위에 떠 있는 헬기가 잠자리 같은 모습으로 캠프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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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북극 나그네 앤지와 함께 이틀 동안 백야의 산림평야를 여행하고 앵커리지로 돌아왔다. 그후로도 그녀를 계속 만났으나 그녀는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생선가게에도 소홀해졌고 나로 인해 점점 자제력을 상실해가는 것만 같았다. ...

5. 땅끝에 선 연인 file

5 땅 끝에 선 연인 칵테일바에서 악사들의 섹스폰과 기타연주를 들으며 잠시 빌리와 마주앉아 자넷트를 만났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으려니 웨이츄레스가 앵커리지의 폴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알려 주었다. “ 폴 ? 반가워, 그동안 어떻게 지녔어 ...

6. 외지의 겨울 file

6 외지(外地) 의 겨울 십일 월에 접어 들면서부터 델타의 산림평야는 눈 속에 묻히고 살을 에이는 듯한 한랭한 대기에 휩싸였다. 그것은 폭설이 쌓인 북극의 설야가 깊어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백야에 피어나던 그리움들은 이제 기나긴 겨울밤의 ...

7. 댈타여 안녕 file

7 델타여 안녕 빌리가 나를 데리러 왔을 때 밖은 이미 짙은 어둠이 깔리고 진눈개비가 날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늘 사냥의 안내자 노릇을 했던 톰의 집에 들려 그를 데리고 갔다. 빌리의 통나무 캐빈에 이르자 그의 부인 ...

8. 검은 가와가닌 file

8 ________________ 검은 카와가닌 나는 갑자기 예정도 없이 서둘러서 델타를 떠나는 것에 대해 궁금해 하는자넷트에게 굳이 어줍잖은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스월드의 정신요양원에서 퇴원하게 되는 앤지와의 관계를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