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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야에 피는 물망초

Views 1390 Votes 0 2015.12.05 03: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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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야에 피는 물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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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토기엑에서 돌아온 다음날 폴의 주선으로 베델로 가는 12인승 소형
여객기에 좌석을 얻어냈다. 폴의 자동차를 타고 비행장으로 향하면서
나는 지난 칠 년이라는 세월동안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또 다른 삶의
영역에서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깊은 허탈감에 빠져 들기도 했다.
  베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있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었고,
예전엔 미처 의식할 수 없었던 기억들이 계속 나의 의식 세계를 비집고
들어섰다.
 “ 피제이, 자네 지난 일주일 동안 생각지도 않게 고민을 많이 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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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에 가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기분을 좀 진정시키게.”
  폴은 운전대를 잡고 말없이 덤덤하게 앉아있는 나의 모습을 힐끔거리며 쳐다
보았다.
“ 어차피 시간이 걸리겠지. 지난 몇 일 동안이 내게는 십년 세월처럼 느껴지네.”
“ 이해가 되네. 그러나 앤지가 자네 때문에 불행해졌다는 자책에 빠져서는
안되네. 그런 자책을 계속하면 자네마저 불행해지는 수가 있어.”
“ 피차가 더이상 불행해져서는 안되겠지.”
“ 그야 이를 말인가. 사실 지난 밤에 앤지로부터 전화가 왔었어. 자네가 떠나는
시간을 묻더군. 비행장에 나오면 잘 위로해 주게. 그녀는 자네가 자책감을
느끼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거야.”
  폴은 평소에 무뚝뚝한 그의 태도 답지않게 자상했다.
“ 자네까지 내 일에 너무 신경을 쓰게 되었군.”
“ 천만의 말씀. 오히려 내가 아니었더라면 자네는 앤지를 이렇게 다시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스지와도 얘기를 했지만 우리 부부는 자네와 앤지 모두에게
언제까지나 좋은 친구가 되길 간절히 바라네. 한국사람들은 센티멘탈하고
다혈적인 데가 많은것 같아. 자네의 경우는 상당히 냉정한 편이지만.”
“ 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게. 앤지의 문제는 윤리적인 논리성으로 해결
될 것이 아니네. 운명적인 삶의 순리에 맡기는 수밖에.”
“역시 당사자인 자네의 생각이 아무래도 더 깊이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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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은 내말에 어떤 공감을 가졌는지 아니면 자신의 조언이 필요없다고 생각
했는지 나와 앤지의 문제에 대해 더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앵커리지 북쪽 외곽 변두리에 있는 간이 비행장에 도착했을때 앤지가 먼저
나와서 폴과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게에서 일을 하다가 나왔는지 청바지에 검은 가죽자켓을 걸친
편한 차림이었다. 비행장의 로비에는 여행객이 별로 없다보니 마치 버스 종점의
대합실처럼 한가했고,대낮인데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에스키모 사내들이
눈에 띄었다. 폴은 비행기가 떠나기 전에 얼마동안이라도 나와 앤지가 이야기를
나누게 해주려는 뜻인지 재빨리 나의 짐을 챙겨 나대신 탑승 수속을 했다.
“ 지난 밤에는 어떻게 편히 쉬셨나요? 토기역에서는 미안했어요. 제가 너무
과민하게 굴었던 것 같아요. 사과 드릴께요.”
가라앉은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 신경쓰지말아. 내가 연지에게 사과까지 받을수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
“ ,…….”
“ 행복해져야해. 절대. “
가까이 다가선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 잠깐만. 이것….. 재만씨 드릴려고 간단히 쇼핑을 했어요. “
포장을 단정하게 꾸린 두 개의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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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옷과 양말이예요. 필요하실 거예요. 혼자 지내시면 빨래도 자주 못하실텐데.”
“ ……….”
지난 날의 기억이 자꾸 되살아나고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의 어느 곳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부디 몸조심 하시고 건강하세요. 가끔 연락도 주시고요. 필요하신것 있으실
때는 꼭 말씀해 주셔야 돼요. “
“ 그래 고마워. 연지도 몸조심하고. “
“ 다음에 베델에서 나오시면 제가 좋은곳으로 여행하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볼께요.”
그녀는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려고 애를 썼다.
나는 폴에게서 탑승 티켓을 받아들고 여객기의 트랩으로 다가섰다.
폴은 억센 손으로 나의 두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며 격려해 주었다.
트랩에서 다시 돌아보았을때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입술을 꼭 다물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활주로를 향해 미끄러져가는 여객기의 창문을 통해 앤지와 폴이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눈물 가득 고인 나의 시야에 어른거리며 멀리
사라져갔다.

  베델에 도착한 후 몇일 동안은 들뜬 기분을 정리하기에 부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걸리는 것이 있다면 내게 직장을 마련해준 사람이, 다름아닌
한때 연지에게 마음을 빼앗겨 넋을 잃었던 나까야마 진따로라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곳에서 여름 한 철만 보내고 돌아가겠다는 생각으로 기분에
동요되지않고 견디겠다는 다짐을 했으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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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에 도착한지 몇일 후부터 그녀로부터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가 왔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나도 그녀에게 전화받는것이 일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더욱이 백야가 계속되는 북극의 절후를 경험해 보지않은 나로서는 수면을
취하는데 상당한 애로를 느꼈고 처음에는 수면부족으로 식욕을 잃을
정도였다. 직장에서 돌아오면 술과 낚시 아니면 잠자리에 들기전에 앤지와
삼십분씩 또는 심지어 한시간 이상 전화통화를 하는것이 고정된 일과였다.
그러나 그녀와 계속되는 교류는 나를 점점 고뇌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녀는 전화를 하면서도 때로는 만취한 채 한없이 흐느껴 울기도하고,
어떤때는 예기치않게 명랑하고 밝은 목소리로 안부를 물으면서 일상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잡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예측할수 없는 감정의 변화에
당황하기 일쑤였는데 나는 그녀에게 일종의 정신질환에 가까운 우울증이
있다는것을 나중에 알아차렸다. 내심 안타깝게 여기다가 폴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고 상의를 하게 되었다.
  폴의 말에 의하면, 알라스카에는 알콜중독이나 우울증이 다른곳보다는
심한 편이며 일종의 풍토성 질환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앤지의 경우는 본인 자신이 자제력을 상실하고 이곳 환경에 제대로 적응을
못한데다가 예기치 않게 나를 만난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내가 베델에 머문지 두달 남짓 지난 어느날 앤지는 갑자기 베델로 나를
찾아오겠다고 연락해 왔다. 나는 간곡히 만류하여 내가 그녀쪽으로 가겠다고
사정을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나까야마와 현실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되면 충격을 받을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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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베델을 최소한의 예정된 체류기간인 여름철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앵커리지로 돌아왔다.
 
  앵커리지로 다시 돌아온 첫번째 주말 아침에 폴과 낚시를 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바다가 아닌 강변에서 캠프를 치기로 했다. 폴은 낚시도구를
챙기면서 사냥총과 권총까지 자동차 트렁크에 실었다. 그는 경우에 따라
사냥도 할 수 있고 신변보호용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여담으로
이런말을 들려 주었다.
“ 내가 실례를 한가지 말해주지. 몇년전에 미 육군 장교 출신이 자기부인과
곰 사냥을 갔었지. 그런데 이친구 숲속에서 커다란 브라운 곰을 만난거야.
제대로 경험이 많은 사냥꾼이라면 운이 좋았다고 봐야지. 이 친구는 자신의
사격솜씨만 믿고 곰에게 가까이 접근하여 총질을 했는데 제도로 급소를
맞추지 못하고 빗나간거야.”
“ 당신 또 곰에 잡혀 죽은사람 얘기 하려고 그래요? 그 끔찍한 얘기는 왜
툭하면 꺼내는지 모르겠어요.”
낚시를 따라나선 스지가 상을 찡그렸다.
“ 피제이는 모르잖아.”
“ 곰이 사람을 물었다구?”                                                                              
 “ 그렇다니까. 사람들은 곰을 미련하고 둔한 놈으로 알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거야. 그놈이 총알을 설 맞다보니 그 친구가 실탄을 다시 장진
하는 사이에 덤벼들어 앞발로 그 친구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니까. 같이
따라갔던 부인만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구. 그 브라운곰은 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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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가장 사나운 놈이야. 무려 천 파운드나 넘는 거구인데도 말이야. 성이
나서 덤벼들 때면 시속 40킬로 미터의 속도를 낼 수 있을 정도니까.
물론 이건 극단적인 예라고 봐야지. 곰들이야 순해서 총소리나면 도망
가지만. 오늘 낚시 가서 경우에 따라 사냥도 할수 있는것 아니겠어? 스지
말이야.”
“ 당신이야 낚시에 소질은 있어도 사냥은 별로 아닌가요?”
“ 나야 사냥꾼은 아니니까. 자 피제이 타라구, 앤지같이 억척스러운 사람이
우리 때문에 주말에 시간을 내주었으니 즐거운 캠핑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폴은 그의 부인을 데리고 가면서 짝이 없는 내가 끼는것이 미안했던지 굳이
앤지도 함께 데리고 가자는 제안을 했지만 사실은 폴과 앤지가 나 모르는
사이에 무엇인가 그들만 주고받은 약속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않고서야 폴이 그의 부인과 앤지 그리고 나를 동반한 캠핑 낚시를
주선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모르는 척하고 그의 의도에 따라주는 것이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앤지는 어디에서 기다리기로 했나 ? “
“ 하이웨이 입구에 있는 커피숍으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아침에 시장을
봐 가지고 나오겠다고 했거든요 . “
“ 피제이, 오늘은 정말 즐거운 주말이 될 걸세. 스지 그렇게 생각하지? “
폴은 차를 몰아 길거리로 들어서며 분위기를 잡는 말을 시작했다.
“ 그러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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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제이,내가 자네 입장에서 앤지를 사랑한다면 나는 앤지를 구하겠네.”
“ 그게 무슨 말인가 ? “
“ 그동안 앤지가 나에게도 몇번 전화를 했었지. 그녀는 자네를 만난후 부터
더 자제력을 잃고 자네에 대해 집착을 하고 있는것 같애. 말하자면 모든
부족한 부분들을 모두 자네로부터 충족해 보려는 그런 욕구를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해. 자네가 아직도 그녀에게 애정이 남아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네. 앤지를 데리고 멀리 떠나게.”
“ 그녀는 애도 있고 재혼한 남편도 있어. 어떻게 그런짓을 할수 있겠나.”
“ 그게 문제야. 이곳까지 와서도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려고 고집한다면
어쩔 수 없는거지. 그렇지만 이상태로 가면 앤지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될 걸세’”
“ 앤지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건 어떤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 나는 이곳 알라스카에서 정신질환으로 일어나는 사고를 자주 듣기도
하고 직접 목격하기도 했어. 알콜중독,마리화나 또는 마약등의 사회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것이 심하면 정신질환이 일어나고 그와는 달리 우울증
으로 결국은 병원신세를 지거나 사고를 유발하는 경우가 꽤 많아.
살인이나 자살로까지 사태가 발전되기도 한다 이거야. “
“ 그럼 앤지의 경우도. “
“ 그야 예측할 수 없으나 이 상태로 발전한다면 그럴 가능성도 배제
할수 없지.”
“ 내가 당분간 앵커리지에 머물면서 그녀와 늘 만나보면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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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 보게. 자네에게 쉬운 일은 아닐테니까.”
폴의 말을 듣고나자 불길하고 침울한 생각이 밀려왔다. 차라리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열정만을 그녀에게 기울일 수 있다면 폴의 의견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랑이나 애정이란 명분 하나만으로 인간적인
모든 문제를 초월하려는 행동을 두 번 다시 할 수 없었다. 애정의 테두리
안에서 끝없는 욕망에 도취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좌절과
슬픔이 그댓가처럼 따라다니기 마련이었다. 감정에 행동을 맡기는 것보다
앤지를 놓고 어떤 선택을 다시 한다는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폴과 함께 앤지와 만나기로 약속한 커피솝에 도착했을때 그녀는 캠퍼를
대여해 가지고 미리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하루밤 캠핑 낚시를 하고
돌아올 예정으로 집을 나섰던 폴 부부는 앤지가 밴트럭이나 몰고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녀가 대형캠핑카를 준비해 가지고 나오자 좀 의아
해 했다.
“ 앤지가 이렇게 굉장한 준비를 해 가지고 나올 줄은 몰랐는데,..”
폴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 뭐 어때요. 편하고 좋지요.”
스지는 앤지를 거들고 나섰다.
“ 저는 오늘 낚시를 함께 갔다가 내일은 피제이와 캠퍼로 여행을 하고
돌아 가려고요.”
“ 아 그렇군. 피제이에게 관광시켜 주려고? 아주 좋은 생각이예요. “
폴은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머리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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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녀가 몰고온 캠퍼를 운전해 보고 싶었으나 거의 버스크기만
한 대형차 인데다가 초행길이라 자신감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캠퍼의 실내는 아늑하고 구조가 짜임새 있고 아담하게
꾸며저 있었다. 텔레비젼 수상기와 프로판 개스용 조리시설,옷장과 침대
그리고 소파 등 호화스런 이동식 별장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캠퍼의
실내에 처음으로 앉아보는 나로서는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폴이 그의 승용차를 몰고 앞장을 서자 앤지는 노련한 자세로 캠퍼의
핸들을 잡고 뒤를 따라나섰다. 나는 그녀의 운전솜씨를 보고 안정감을
느끼다가는 문득 그녀가 뉴욕에서 살때 야채와 생선 운반 트럭을 운전한
경험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비록 나이는 나보다 칠팔 년이나 연하였지만 삶의 체험이나 정신적인
연륜은 나를 훨씬 앞서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지난 삶의 체험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결국은 나 자신을 부인
하는 것과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운전석 앞 대쉬보드에 설치한 카스테레오 세트에 컨추리 뮤직이
담긴 테이프를 틀어놓고 한동안 침착하게 운전을 계속했다. 나도
그 분위기에 빠져 들고 있었다.
“ 요즈음 수면을 취하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으세요? “
그녀는 라디오의 볼륨을 낮추며 말을 걸어왔다.
사실 베델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백야를 경험해보니 수면시간을 조절하는데
얼마동안 애로를 느꼈다. 피로를 느끼면서도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
나기가 일쑤였고 시계를 보며 수면 시간을 측정하기도 하고 남들처럼
검은 천의 커텐을 창문에 드리우고 술을 마신 후에 잠을 청하는것이 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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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베델에 있을때 술에 취해서 잠을 이루곤 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처음에는 꽤 어려움을 느꼈지만 이제는 그런대로 지낼만해. “
“ 수면에 애로를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습관이 들게
되나봐요.”
“ 알라스카에 계시는 동안 술을 많이 마시지 않도록 하세요. “
그녀는 알콜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술을 마시면서 남의 말을 하듯이
했다.
“ 글쎄. 이대로 간다면 나도 술꾼이 될것 같군. “
“ 그래요 ? 재만씨마저 술꾼이 된다면 정말 비관적이예요. 나도 술꾼이
되고 싶어 된건 아니지마, 아무튼 주량은 컨트롤 하셔야 돼요. “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 주량이 늘어난 정도는 아니니까. 아직까지 내자신을 술에 의지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어.”
“ 그럼 저는 술에다가 자신을 의지하고 싶어서 술을 많이 마시는 꼴이
되었군요. 그렇지만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아요. 그동안에도 술이 필요해서
마셨지만 앞으로도 또 필요 한만큼 계속 술을 마실테니까. “
그녀의 말투는 거의 낙담하는 식이었다.
“ 무슨 말을 그렇게 하지 ? “
“ 듣기가 언짢으실지는 몰라도 저는 솔직히 말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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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내말에 따라 날카로워짐을 느끼며 분위기를 빨리
전환시켜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 오해하지 말아. 연지를 의식하거나 연지에게 거리감을 두고 한말은
아니야. 그러나 연지 스스로 술을 끊도록 노력해야 한다구. 정말 나로서도
그 문제에 대해서만은 연지에게 무슨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솔직히 말해서 충격적인 면도 없지않았지. 아직도 연지는 젊고 미모가
있어. 이대로 좌절할 수는 없잖아. “
“ 그러는 재만씨는 늙었나요? 하긴 저로서는 돌이켜보면 남보다 몇 십년을
더 살아봤다는 착각을 할때가 있어요. 그래서인지 남의 삶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어요. 하기야 자신에 대해서조차 무관심했던 내가 남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니겠어요.”
점점 그녀와의 대화가 부담스러웠고 화제거리를 찾아 낼만한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비관적인 생각이 보다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의 불행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아집 일수도 있었다. 자신의 불행과
슬픔을 통해서만 바라본 세상은 상대적으로 연지에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알콜중독 증세보다는 부정적인 관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
자신을 회복하는 첫번째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나마도 그녀가
유배지라고 생각하고 찾아온 이곳 알라스카에서 어떤 극적인 변화없이
생활을 계속하는 한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 역시 현실적으로
그녀에게 있어선 무력한 존재일 뿐이었다. 사랑이나 애정이라는 명분만으로
그녀를 데리고 도피해 버리는것이 그녀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면 나는 그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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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 나와 함께 멀리 떠나는 것이 어때? “
“ 이제와서 갈 곳이 어디 있겠어요. 끝까지 다온것 같아요. 그리고 재만씨를
나의 불행에 끌어 들이고 싶지는 않아요. 불행은 나 하나만의 것으로
끝나야지요. “
“ 그와 반대로 생각하 수 도 있지. 연지가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불행에서 빠져나온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생각이라는 것은 언제나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이 있게 마련이지. “
“ 어차피 부정과 긍정은 공존하고 있다는 말 같군요. “
그녀의 생각은 나를 앞지르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해와 설득이란
방법은 별로 의미가 없는것 같았다.
“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식과 진실을 구분한다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없지요.
고등학교 때 재만씨가 선생님으로 부임 해왔을 무렵 모파상의 ‘목걸이’를
읽어 보았지요. 그때는 그 소설에 꽤나 감동을 받았아요. 그렇게 착한 여주인공이
일시적인 조그마한 허영심 때문에 가짜 목걸이 하나로 슬프고 고달픈 인생을
엮어가는 것이 안타까웠고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지요. 그러나 나이가
들고나선 그 생각도 변하더군요. 가짜와 진짜가 과연 어떤 의미로 구분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 거지요.
  원인은 그 여인의 조그마한 허영심과 보잘것 없는 가짜 목걸이에서 비롯
되었지만 그 여인이 살아온 인생은 진실한 거예요. 저는 아직도 스스로에
대한 실상과 허상이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어떠 때는 모두가 허상인 것같고
어떤때는 모두가 현실인 것 같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모순 그 자체인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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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설프게 웃었다.
“ 제가 혼자서 수다를 떨은 것 같아요. “
“ 아니야. “
고속도로를 벗어나 수목이 울창한 한적한 도로에 들어서자 앞서가는
폴의 차와 앤지가 운전하는 캠퍼만이 한동안 주행을 계속하였고 이따금
반대방향에서 달려오는 자동차와 마주치며 지나칠 때면 서로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곤 했다.
  숲속에는 회색빛 고목들이 쓰러져 있고 음지에는 잔설이 쌓여 있는가
하면 햇볕이 드리워진 양지에는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피어 있었다.
북극의 대지에서 피어나는 야생화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어느 꽃보다
모진 아픔을 견디어야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 재만씨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세요 ?”
“ 잠시 감상적인 생각을 했지. 눈과 꽃을 함께 보니까 신기하면서도
슬픈 생각이 드는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동토속에서도 생명을
지켜온 저 야생화들이야말로 이세상 어느것보다도 생명의 순수한 가치가
있는것 같군,”
그녀는 슬픈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 제가 외로운 감정을 느끼게 만든건 아닌가요?”
“ 사람은 고독을 누릴때 가장 행복하고 진실한지도 몰라’ “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인간은 고독을 통해서만 비로소 자신의 진짜모습을 발견 할수 있다고
생각해. “
“ 정말 그럴까요 ? “
“ 한국행을 포기하고 알라스카로 떠난다는 결심을 했을때 부터 비로소
그런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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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했나요 . “
“ 이제 그 모습을 찾아내고 있는것 같아. “
나는 운전대를 잡고 그녀의 손에 나의 한쪽 손을 얹어 놓았다.
“ 믿어지지 않아요. ‘
“ 연지는 아직도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야. 이제부터 나와 함께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찾는거야. “


숲속의 도로를 삼십 분쯤 더 달리고 난 후에 캠핑낚시를 하기로 예정된
장소에 도착했다. 폴과 앤지가 포장도로에서 벗어나 숲속의 빈터에 차를
세웠을 때 미처 예상치 못했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고 나는 한 순간에
모든 잡념이 씻겨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수목이 울창한
산림평야 한가운데 강줄기가 시원스럽게 뻗어있고 소리치면 숲속의 나무들이
쓰러지고 강물이 곤두박질 할 듯이 고요함이 감도는 곳이었다.
  나는 앤지를 도와 낚시도구와 필요한 장비를 캠퍼에서 챙겨들고 밖으로
나오다가 그녀 역시 뒷 편에 있는 침대 밑에 샷건과 권총을 보관하고
있는것을 보고 놀랐다.
“ 아니 사냥을 하러 온것도 아닌데 왜 총을 가지고 왔지. 평소에도 총을
가지도 다녀 ? “
밖으로 나오자마자그녀에게 물었다.
“ 필요에 따라 가지고 다니지요. 그리고 이런곳에 올때는 꼭 필요한것
같아요. 야생동물을 만날때도 있으니까요. 호신용이지요. 아마
폴도 총을 가지고 왔을 거예요. “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설명했다.
                                                                                            104
                                                                                                                                                     
“ 하긴 폴도 집에서 총을 챙기더군.”
나는 총기 휴대를 낚시도구 챙기듯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불필
요하게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같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피제이 이곳 분위기가 맘에 들어 ? “
폴이 다가오며 물었다.
“ 마치 원시림에 온것 같아. “
“ 그럼 됐어. 오늘은 이곳에서 캠프를 하고 내일은 앤지가 마련한 스케줄에
따라 여행을 하게. 우리는 앵커리지로 돌아갈테니. 자, 우리 낚시터부터
먼저 살펴보자고. 앤지는 어느쪽이 맘에들어요 ? “
“ 저는 피제이와 저쪽 상류에서 한번 시작을 해보지요. “
그녀는 햇볕이 내리 쪼이는 상류쪽을 가리켰다.
“ 그럼 우리는 이쪽에서 자리를 잡지요. “
스지는 폴의 팔을 끌어당기며 의미있게 웃어보였다.
“ 바베큐는 제가 준비해가지고 왔으니까 식사준비는 별도로 하지 마세요.
나중에 함께 바베큐를 해야지요. “
“ 앤지가 그런 준비를 하리라고 기대했어요. 사실 낚시보다 한국식 갈비
구이에 관심이 더 많다구. 스지 당신은 어때 ? 코리언 바베큐 말이야. “
“ 군침부터 넘어가는데요. “
나는 앤지와 함께 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낚시보다도 숲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주위의 분위기에 동화되었고 차를 타고 올때와는 달리
한결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 더 올라가지 말고 이쯤에서 자리를 잡아요. 오늘 이곳에서 캠핑하는게
정말 맘에 드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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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와는 달리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차안에서 대화를 나눌 때 줄곧 상기된 기분에 젖어
있었다는 것을 새삼 의식했다.
“ 정말 아늑해 보이는군. 낯선 곳에 왔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않아. “
“ 마음에 드신다니 저도 기뻐요. “
그녀는 배낭과 샷건을 내려 놓으며 내가 들고있던 낚시장비를 건네 받았다.
“ 제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잠시 감상이나 하고 쉬세요. “
그녀는 먼저 보온병에서 커피를 종이컵에 따라 내게 건네주고 나서는 낚시대에
바늘을 달고 미끼를 꿰는 등 익숙한 솜씨로 준비를 했다.
낚시에는 거의 문외한 이다시피한 나로서는 그녀가 꽤나 대견스럽게 느껴
졌다. 그녀는 이제 옛날에 나의 하숙집을 찾아와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부끄러워하던 여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손놀림을 관심있게 살펴보았다.
“ 뭘 그렇게 곰곰히 살피세요.? 여자가 낚시도구 챙기니까 이상하게
보이나요 ? “
“ 언제 그렇게 낚시를 배웠지 ? “
“ 지금 제가 갖고있는 직업이 생선장수라구요. 더욱이 알라스카에서
말이예요. 그건 농담이구요. 저도 알라스카에 와서 낚시는 많이 해 봤어요.
자, 이제 낚시대를 잡아보세요. 강낚시는 민물이나 바다 낚시와는 달리 편하게
자리 깔고 앉아서 하는게 아니지요. “
그녀는 낚시대를 쳐들고 휘둘렀다.
낚시추는 포물선을 그리며 가볍게 강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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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바다까지는 거의 삼십 마일이나 된다구요. 그런데 연어들은
이곳까지 강물을 거슬러 올라와 알을 낳고 바다로 돌아가거든요.
비록 물고기일망정 고향을 찾는다고나 할까 아니 그보다는 자신을 확인하는
귀소본능이라고 봐야지요. 알에서 나온 새끼들은 바다로 나가 성장하며
살다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다시 찾아오고….”
나는 한손으로 낚시대를 받아 땅바닥에 떨어뜨리며 그녀를 힘껏 끌어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러면서 세월의 공백속에
잊혀졌던 감정을 다시 느꼈다. 그녀는 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동안
기대어 있었다.
“ 재만씨 우리이제 알라스카에서 헤어지면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까요?”
“연지, 우린 이미 만남과 이별이라는 감정을 체험했던 사람들이야.
자, 여기까지 왔으니 우선 낚시부터 해보자구. “
나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끌어안고 있다가 다시 낚시대를 들었다.
나는 그녀와 나란히 서서 건성으로 낚시대를 잡고 있었으나 생각지도 않게
나의 낚시에 먼저 연어가 걸려들었다. 낚시대가 휘청거리며 낚시줄에
팽팽한 탄력이 일어나자 나는 당황하며 소리쳤고 옆에 있던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릴을 조심스럽게 감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맑은 강물 바닥에서부터
붉은 빛갈의 커다란 연어가 끌려나오는 모습이 마치 어항속의 물고기를 보듯이
선명했다. 연어가 수면에 떠오르기전에 그녀는 족대에 달린 그물로
연어를 건져냈다.
“ 이거 눈 먼 고기아니야 ? 나한테 잡히다니. “
처음 경험해보는 연어 낚시에 흥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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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좋으세요 ? “
그녀는 흥분하는 나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며 연어의 입에서
낚시바늘을 제거했다.
“ 이렇게 큰 물고기는 처음 잡아보는 거라구. 내가 제일 먼저 낚아
올렸잖아. “
“ 그래요. 오늘 재만씨 혼자서 이 강에 있는 물고기 다 낚아 올리세요.
알라스카에서는 낚시꾼이 따로 없어요. 이따가 보세요. 계속 잡힐 테니까.”
그러나 잠시 후에 그녀가 캠퍼에 가서 군것질 할 것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떠난지 얼마 안되어 캠퍼를 주차해 놓은 부근에서 낚시를 하던
폴이 큰 소리로 나를 부르며 무어라고 소리쳤다.
나는 잘 알아 듣지못해 그를 먼 시선으로 바라보며 반문을 했다.
“ 피제이 자네 뒤에 곰이 나타났다고. “
그는 대수롭지않게 손짓을 했다.
“ 농담하지 말게. “
폴을 바라본채 그의말을 그냥 받아 넘겼다.
“ 농담이 아니야. 자네 뒤를 보라니까. “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며 주위를 살폈고 한순간에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불과 이십여 미터 뒤에 나의 시야에 들어온 물체는 두마리의 흑곰이었다.
내가 낚시대를 팽개치는 순간 폴이 외치는 소리가 귓전에 어렴풋이 들려왔다.
“ 피제이 놀라지말아. 그 흑곰은 사람을 해치지 않아. 그냥 있으라구. “
그러나 이말은 나의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나는 샷건을 집어 들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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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의 눈빛을 보는 순간 기가 꺽인 채 캠퍼를 향해 허겁지겁 몇 걸음 내딛다가
그만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 발을 내디딜려고 하자
앤지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 재만씨 ! 놀라지 마세요. 괜찮아요. “
나는 그제서야 안심하여 뒤를 돌아보았고 두마리의 곰은 잰걸음으로
내게서 등을 돌려 강 상류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사지에 맥이 쭉 빠졌고 혼자서 허둥거렸던 것이 어처구니 없었다.
폴은 혼비백산하여 허둥대는 나를 보고 한바탕 웃어 제끼다가는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 피제이, 자네가 크게 놀란 모양이군. 오히려 나는 자네가 총질을 할까봐
가슴을 조였다고. 좋은 경험했지 뭔가. 사슴이나 곰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
짐승이야. 추억에 남을 걸세. “
“ 난 오늘 십년 감수했어. ! 그 놈의 곰들이 내게 꼭 덮치는 줄 알았지 뭐야. “
큰 소리로 대꾸하며 머쓱해진 기분을 가라앉혔다.
“ 놀라셨지요 ? 하필이면 내가 자리를비운 사이에….”
“ 결국은 여기서 곰 보고 놀란사람은 나밖에 없는 셈이군 .”
그녀는 한손으로 나의 팔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입을 막으며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내쪽에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여
낄낄거리며 웃고 말았다. 그때문에 모두들 마음놓고 웃어 제켰다.
백야의 강변에서 바베큐를 즐기며 술을 곁들인 채 환담을 즐기다보니
시간은 기억 밖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109
  나는 스스로 몸을 가누는 것이 힘들만치 술에 취했고 그것은 자의적인
것이기도 했다. 말할 것도 없이 앤지에 대한 심적부담을 덜어버리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녀가 자제력을 잃을 만큼 과음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 의도는 맞아 떨어졌다. 내가 과음을 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자신은
술을 삼가하고 오히려 나를 돌봐주려고 했다.
“ 피제이가 술을 많이 마신것 같아요. 앤지, 캠퍼에서 자도록 도와주세요. “
  스지는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내가 안스럽다는듯이
앤지에게 말했다.
“ 피제이가 술에 취하는건 못 봤는데. “
폴 역시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둥 거렸다.
“저도 이러시는건 처음 봤어요. 염려마세요. 제가 캠퍼로 모시고 가지요. “
그녀는 나를 부축하여 일으켰고 사실 정신까지 깜박거릴 정도는 아니었으나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캠퍼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뒷편에 있는 침대에 가서
풀썩 주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잠자리를 깔아주고는 나를 눕혀 주었고
손수 신발까지 벗겨주었다.
“ 재만씨 주무세요. 저는 밖에 나가서 폴이랑 스지와 함께 얘기나 하다가
나중에 졸음이 오면 캠퍼로 돌아오겠어요. “
“ 나가지 말아. 내 곁에 있으라구. 연지와 얘기하고 시어. 창문의 커튼도 닫아버려.”
나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 알았어요 “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캠퍼의 창문에 달린 블라인드 셔터들을 내렸다.
빛이 차단된 캠퍼의 실내는 어둠이 두텁게 드리워졌다.
“ 저 해는 서산 마루에 그냥 주저앉아 있다가 다시 떠오르겠지 ? “
나는 눈을 감은 채 여전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겨울이 오면 어둠 속의 긴 여로를 맞이할 거예요. “
“ 그럴테지. 빛을 그리는 어둠을 따라 가겠지. 연지 내 곁에 있어. “
눈을 감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내 곁에 다가와 앉으며 나의 손을 잡아
주었고 나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어둠속에서 가깝게 다가온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슬픈 눈망울이 백야의 태양보다도 더
빛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그녀의 눈빛은 황량해진 나의
가슴에 따스하고 슬픈 기억들을 다시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있었다. 수많은
기억의 색깔들이 가슴에 채워졌고 그녀를 품안으로 와락 끌어당겼다.
“ 연지, 차라리 눈 먼 한쌍의 검은 새가 되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으면
좋겠어. “
그녀의 귓전에다 나직히 속삭였다.
“ 재만씨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댔고, 우리는 서서히 격렬하게 키스했다. 기억은
점점 깊은 어둠속에 하나씩 묻혀가고 있었다.
다음날 잠자리에서 깨어났을때 캠퍼의 창문에는 여전히 불라인드 셔터가 드리
워져 있고 밖에서는 폴과 스지 그리고 앤지가 무어라고 주고 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멀뚱한 시선으로 그냥 자리에 누워 있으려니 앤지가 들어섰고
                                                                                               111
그녀는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약간 머쓱해진 표정을 지으며 이내 키친의
커피팟과 컵을 집어 들었다.
“ 이제 다 주무셨어요 ? “
“ 지금 몇시나 됐지? “
“ 낮 열두시가 다 됐어요.”
“ 벌써 ? “
“ 술에 약하시면서 무작정 그렇게 마시다니……정신없이 주무시더라구요
코도 골면서요. “
“ 내가 코를 골아 ? 나는 이제껏 코를 골아 본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
“ 우선 커피나 한 잔 드세요. “
“ 목이 무척 마르는군. “
그녀는 커피를 한잔 따라가지고 내곁에 다가왔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잔을 받아들었다.
“ 폴과 스지는 지금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 “
“ 그래? 내가 술에 취하는 바람에 혹시 재미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군. “
나는 우선 커피를 마시며 갈증을 해소했다.
“ 폴과 스지가 떠나면 우리도 곧 떠나요. “
“ 어디로 가지 ? “
“ 석유파이프라인을 따라서 북쪽으로 올라가요. “
“ 좋아. “
아무 생각없이 대답해 버렸다.
앤지가 블라인드 셔터를 올리자 눈부신 태양빛이 창밖의 숲속에 가득했고
어제처럼 조용히 물줄기를이루며 흐르는 강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문득 이 순간이 영원히 머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112
  지난밤에 앤지의 품에서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내가 품에 그녀를 끌어
안고 잤는지몰라도 조용히 흐르고 있는 강줄기를 바라보며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애정이라는 것은 소유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햇빛처럼 머물고
강물처럼 바다에 이르는 것이라고 느꼈다.
  앤지와 함께 밖으로 나가자 폴은 이미 텐트를 거두고 장비를 챙긴
다음이었다.
“ 피제이 우리는 지금 떠나야겠어. 자네는 앤지와 함께 좀더 여행을 즐기
다가 돌아오게. “
“ 내가 지난 밤에 술을 좀 많이 마셨나봐. “
“ 하긴 그렇기도 하지. “
“ 피제이 이거 받으세요. “
 스지는 자동차 트렁크 위에 놓아 두었던 작은 꽃송이를 몇개 들고 와서는
내 앞에 내밀었다.
“ 이거 아시죠 ? 백야의 여름에 피어나는 야생의 물망초예요. 어서요. “
“ 그래요 고마워요. “
나는 스지가 건네준 물망초를 받아들고 고개를 들어 울창한 숲사이로 드문
드문 비치는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 피제이 그건 스지가 앤지를 대신해서 자네에게 주는 걸세. “
폴은 나의 어깨를 가볍게 툭 건드리고 나서 자동차에 올랐다.
앤지와 나는 폴과 스지의 자동차가 숲속을 빠져 나갈때까지 지켜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폴의 자동차가 시계를 벗어나면서 잠시 생각치 못했던 허탈감도 생겼지만
                                                                                               113
옆에 서 있는 앤지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울창한 숲속이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라는 환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 체엄해보지 못한
감정적인 변화였고 그녀를 통해 무엇인가를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원시림 같은 이 자연속에 이렇게 두 사람만이 남아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랄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녀와 내가 헤어짐의 상처를 안고 살아 온 과거를 보상
받기 위해 이미 예정되어 있던 운명적인 시간과 공간의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 이 순간이 영원할 수 만 있다면 연지의 모든것을 내 가슴에 묻어 버리겠어.  “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수목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쳐다 보았다.
“ 지나온 날들이 오늘 이 시간을 위해 그토록 고통스러웠던것만 같아요. “
그녀는 벅찬 감정을 가누지 못하고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밝고 순진한 웃음을 보였다.
“ 연지, 우리 언제 떠날까 ? “
“ 그건 우리 천천히 생각하도록 해요. 시장하실텐데 우선 식사 준비부터
    할게요. “
“ 식사하는 시간도 아깝다고, “
“ 캠퍼로 올라가세요. “
그녀와 나는 캠퍼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운채 한참동안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이것은 상대방을 통해 서로가 자신을 확인해가는 자각행위이기도 했다.
영혼과 육신이 정신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남녀간의 애정도 비로소
완숙한 경지에 이르지만 이 단계에 이르는 것이 의식적인 노력만으로는
                                                                            
                                                                                             114
불가능한게 우리 인간들의 한계이고 모순이리라.
  바로 이 한계와 모순때문에 희비가 엇갈리는 애정적 갈등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남녀간의 애정도 미추의 양면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체취를 음미하며 깊은 환상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애무하면서 나는 알몸이 그대로 드러난 채 내 앞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나신이 된 그녀는 빛이 무겁게 차단된 숲속에서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잠시 후 햇살이 살짝 드러난 따스한 숲속 빈터에 이르자
알몸이 된 나를 풀밭에 눕혔다. 그리고는 깊고 가득한 손길로 스스럼없이
나의 전신을 애무하면서 소유욕에 불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밀착된 두 몸이 풀밭 위를 몇 바퀴 구르는 상상을
하면서 나는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을 느꼈다.
  눈을 뜨자 그녀는 약간 수줍은 듯 나를 바라보며 약간 떨리는 듯한 목소
리로 속삭였다.
“ 지금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알고 싶어요. “
“ 연지가 나신의 천사가 되어 숲속을 달려가더군. “
그녀는 웃을듯 말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볍게 입을 열었다.
“ 전 늘 당신 꿈을 꾸곤했어요. 그리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깊은 허탈감에
빠지구요. “
“ 전 항상 똑같은 꿈을 꿔요. 당신은 제 손을 잡고 눈 덮힌 산 속으로
들어가지요. 얼마만큼 걸었는지 어디인지 그것은 알수 없어요. 다만, 당신과
내가 그렇게 있을 뿐이예요.
                                                                                               115
우리는 몇 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고목나무 옆에서 모닥불을 피웠어요.
추위가 녹아 들어갈 때마다 우리의 몸은 따뜻해져 갔지요. 모닥불 옆에서
우리는 황홀한 애무를 나누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당신은 내 곁에서 떨어져
제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는 그대로 숲속으로 사라져 버려요. 저는 당신의
발자욱을 따라갔지만 당신은 이미 오간 데가 없었어요. 그렇게 숲속을
방황하다가 눈속에 파묻히면서 가위에 눌려 꿈에서 깨지요. 꿈을 깨고
난 후 갖게되는 허탈감은 내 모든것을 분해시켜 버리고 말것 같아요.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녀를 데리고 창가로 다가갔다.
“ 연지, 저 강줄기를 보라고, 저 흐름을 따라 앞서 달리든 뒤따라 달리든
나중엔 바다에 이르는 거야. 지금은 짠 맛이 없는 민물이지만 큰 바다에
이르면 소금기를 지닌 바닷물로 변하지. “
  나는 말끝을 제대로 맺지 못한 채 태양빛에 너울거리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흐르는 강물이 멈출 수 없듯이 영감과 육감의 완전한
결합을 전제로 하는 애정도 끝없는 자각이 연속되면서 삶의 세파와
조화를 이룰때, 지순한 가치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자 그녀가 과거의
나의 여인이 아닌 전혀 다른 여인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이러 상념은
그동안 방황과 갈등으로 점철되어왔던 그녀와의 과거를 잊고싶은 강한
잠재의식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우리는 아직 바다에 이르지 못한 강물과 같은 그런 관계의 사람들인
것 같아요.얼마나 더 달려가야 우린 긴 여로를 마치고 해안에라도 정착
할수 있을까요. “
“ 삶의 가치는 변화의 흐름을 타면서 머물고 싶은 생각을 가질 때가 아닐까.
                                                                                               116
애정이란 바로, 머물고 싶은 아름다움일거야. 그리고 지금이 바로 내가
연지와 머물고 싶은 순간이야.”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불라인드 셔터를
가만히 내리고 그녀의 옷을 한겹한겹 벗겨 내려갔고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는 내 품안에 달려들며 전신에 휘감겨왔다.
  우리는 끝내 머물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에 더욱 깊은 애무를 나누었다.
지난날 어느 한 순간도 기억되지 않을 만큼 진하고 강렬한 순간이었다.
그리고는 슬픈 허탈감에 빠진 채로 깊은 잠에 취해버렸다.
그녀와 나는 자정무렵에 잠에서 깨어나 커피와 샌드위치로 시장기를
때우고 카스테레오에서 음악을 듣거나 잡담을 나누며 백야를 보냈다.
숲속에 태양 빛이 따사롭게 깃들자 그녀와 나는 캠퍼를 타고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야의 창문을 커튼으로
가리고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라서 도로는 적막하리만치 한가했다.
20세기에 미국이 이룩해 놓은 것이라고 비유하는 석유파이프라인을 따라
계속 북상을 하며 그녀와 나는 전날 오후에 느꼈던 진한 감정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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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외지(外地) 의 겨울 십일 월에 접어 들면서부터 델타의 산림평야는 눈 속에 묻히고 살을 에이는 듯한 한랭한 대기에 휩싸였다. 그것은 폭설이 쌓인 북극의 설야가 깊어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백야에 피어나던 그리움들은 이제 기나긴 겨울밤의 ...

7. 댈타여 안녕 file

7 델타여 안녕 빌리가 나를 데리러 왔을 때 밖은 이미 짙은 어둠이 깔리고 진눈개비가 날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늘 사냥의 안내자 노릇을 했던 톰의 집에 들려 그를 데리고 갔다. 빌리의 통나무 캐빈에 이르자 그의 부인 ...

8. 검은 가와가닌 file

8 ________________ 검은 카와가닌 나는 갑자기 예정도 없이 서둘러서 델타를 떠나는 것에 대해 궁금해 하는자넷트에게 굳이 어줍잖은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스월드의 정신요양원에서 퇴원하게 되는 앤지와의 관계를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