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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노을 속에 피어나는 모닥불

Views 763 Votes 0 2015.12.04 18: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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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속에 피어나는 모닥불


노을속에.jpg



  좌석의 머리 위에는 안전벨트 경고와 금연이라는 전광판의 램프가 켜지면서 비행기는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이십분 후면 비행기는 앵커리지 공항에 도착하게 된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로스앤젤리스 공항에서 탑승할 때처럼 다시 마음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헤어진 지 십여 년이나 지난 지금, 폴이라는 미군병사 녀석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하는 궁금함도 있었지만 예기치 않게도 그와 알라스카에서 재회하게 된다는 사실이 깊은 감회에 빠져들게 했다.
비행기는 계속 고도를 낮추다가 지상의 물체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해안선을 끼고 날고 있었다. 나는 좁은 비행기의 창문으로 수목평야와 눈 쌓인 하얀 산봉우리를 내려다보며 선입견처럼 북극의 한기를 느꼈다.
  4월 하순인 지금 남쪽에는 화창한 봄날인데 그곳은 어떠냐고 전화로 물었을 때 폴은 북극에도 비록 그 기간은 짧지만 봄, 여름, 가을이 모두 있으니 염려 말라고 일러주었다. 그래도 내게는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항상 멀리 떨어져 있는 별세계로만 알고 관심밖에 있었던 북극 땅을 이제 나그네의 신분으로 찾아오게 된 것이다.
  한국의 남해안 통신기지에서 미군과 합동근무를 하던 군복무시절 친구로 사귀었던 폴이라는 몬타나주 출신의 미군병사를 헤어진 지 십여 년이 지난 뒤에 내가 미국에서 회사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몬타나주 빌링스에 살고 있는 그의 고향 가족과 접촉한 결과, 그가 알라스카로 이주하여 정착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폴과 나는 가끔 전화통화를 하면서 안부를 교환했고 서로가 방문왕래를 바라면서도 생활에 쫒기다보니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그 후 나는 주재원 생활을 청산하고 알라스카에서 직장을 얻게 됨으로서 그를 다시 만날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군복무를 하는 동안 가족들이 보내주는 고향지역의 신문과 잡지를 계속 받아보았고 내게 늘 그의 고향 몬타나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 잊을 수 없는 그에 대한 추억이기도 했다.
  천연공원 ‘엘로우스톤’이며 몬타나에서 인디언들과의 격전에서 전사한 카스터장군의 무용담 등은 그의 고향에 대한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고향 몬타나 주립대학에 유학하기 위해 그와 여러 차례 의논한 적도 있었다.
  그는 몬타나 주립대학 재학 중에 미군에 입대하여 전자통신기술병으로 한국에 파병근무를 하다가 돌아간 것이다.
  나는 로스앤젤리스에서 주재원생활을 끝내고 아예 회사 측에는 사직의사를 밝히고 좀더 독자적인 해외생활을 결심했으나 미래에 대해 뚜렷하고 구체적인 계획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말단 월급쟁이 사원으로 출발하여, 남달리 바쁜 직장생활을 헤쳐나가며 빠른 승진으로 중역간부가 되기까지, 이기적이고 도시화된 자신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보다 직급이 낮은 간부직원을 주재원으로 파견했어야 마땅한 인사관리였지만 나는 나의 해외근무 자원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주를 설득하였고 결국 아래 지위에 있는 간부직원의 해외근무기회를 빼앗아버린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해외근무기간 동안 나의 능력은 사주의 입장에서 볼 때 기대에 어긋난 것이었다.
  나는 이미 한국을 떠날 때 예정된 해외근무 기간이나마 제대로 채울 수 있을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오로지 승진만을 목표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뚫고 지위를 확보했을 때 나는 자신이 원하던 바가 아닌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있었다는 것 을 비로소 깨달았다.
 군에서 전역한 후 짧은 기간이나마 여고교사를 지냈던 것을 끝으로 월급쟁이로서 도시의 소시민적인 생활은 탈피했어야만 했다는 후회가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운동선수로서 대성해보겠다던 학창시절의 꿈은 군에서 제대 후 고작 어느 여고의 체육교사 자리에 만족해야 했고 선생노릇을 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웠으나 그나마도 나의 외양이나 성격에는 맞지 않는다는 등 집안이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핀잔내지 빈축을 받기가 일수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고집스러웠던 나의 성격으로 비추어 볼 때 환경에 굴복했다기보다는 일종의 오기와 같은 비뚫어진 생각으로 사회경쟁에 뛰어든 것이었다. 그리고는 마치 그라운드에 선 운동선수처럼 매사에 승부욕과 집념으로 처신을 하다보니 승진은 빨랐지만 정신적으로 퇴보를 거듭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경쟁의 상대가 나를 시기하고 이면에서 나를 끌어내리려는 공작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그에게 그 만큼 상처를 주었다는 반증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공돌이와 공순이들을 혹사시키며 탈세와 외화도피를 일삼는 사주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승진했고, 독과점 외국인 업체를 위해 관리들에게 뇌물 건네는 일을 예사롭게 해왔다. 코쟁이, 쪽바리, 사막의 대상 등 가릴 것 없이 바이어라면 기생파티를 열어주어야 했고 뚜쟁이들과 연줄을 대고 있어야만 했던 껍데기 국제신사, 그것이 가려진 자화상이기도 했다.
  나는 여기까지 무작정 달리다가 문득 의식이라는 벽에 부딪쳐 깨어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지금 찾아가고 있는 직장은 과거에 한국에서 거래가 있었던 일본인 바이어 ‘나까야마 진따로’가 마련해준 것이었다. 나는 그가 알라스카에서 투자사업으로 생선통조림 가공공장을 세웠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청했다.
  그는 나로부터 뜻 하지 않은 도움요청을 받고 망설이더니 며칠 후에 공장의 관리인 자리를 주선해 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것도 생선조업 성수기인 봄, 여름철 몇 개월 기간이었다.
  내가 근무할 수산물 가공공장은 앵커리지에서 서북방으로 비행기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해안에 인접한 베델이라는 작은 도시에 있었고, 나는 현지에서 근무하기로 약속한 예정일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폴에게 연락하였다. 그는 나에게 현지에 가기 전에 앵커리지에 들려 자기 집에서 머물며 관광도하고 쉬었다가 그곳으로 가면 어떠냐고 제의를 해왔고 나로서는 내심 바라던 참이라 지체 없이 다음날 알라스카로 떠날 채비를 했다.
그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이미 나 자신에게 있어 인생행보의 당연한 수순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후임자로 파견된 사주의 인척에게 업무인수인계를 끝내고 거의 한달 동안을 리스베가스와 그 이외 여러 곳을 여행하며 빈둥거리는 동안 북극행을 결심한 것은 오히려 나의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주는 계기라고 생각했다.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외화획득산업의 첨병이라는 명분으로 기계처럼 동분서주하기만 했던 자신을 살펴볼 마음의 여유조차 가져보지 못한 것이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이었다.
  여객기가 공항 활주로에 착륙하는 순간, 나는 일종의 서글픔과 함께 무엇인가로부터 해방된 듯한 위안을 느끼면서도 땅끝의 허허한 빈곳을 찾아 스스로 유배를 왔다는 생각을 했다.
  브릿지를 빠져나오며 약간은 체념 비슷한 생각으로 그동안 들뜬 기분을 수습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눈앞에는 폴의 모습이 선뜻 나타나질 않았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는데, ‘피제이!“하고 소리치는 비대한 미국인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바로 그가 폴이었으나 꽤나 낮설게 느껴졌다. 그 앳되게 보이던 미군병사 시절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벌써 이마도 벗어지고 비대한해진 체격에 얼굴에는 주름까지 생겨났다. 거구인 그는 나의 어깨를 감싸며 반갑게 맞이했다.
“피제이,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꿈만 같군.”
“나도 그래‘”
“피제이 내 처인 스지야.”
“안녕하세요? 폴한테서 피제이에 대해 너무 많은 얘기를 들어서인 조금도 낮설게 느껴지지 않아요. 정말 반가워요.”
“저두요. 폴 자네 미인 와이프 두었군.”
“다들 그랬었지.” 하고 폴은 무엇이 아쉬운지 스지를 힐끗 쳐다보았고 그녀는 웃는 듯 눈을 흘겼다.
폴의 처는 폴과 대조적으로 나와 비슷할 정도로 큰 키에 미국여인으로서는 빠지지 않을 만큼 출중한 외모라는 느낌이 들었다.
폴과 함께 가방을  찾아들고 공항 밖으로 나와 그의 부인인 스지가 대기시켜놓은 승용차에 올랐다. 폴과 함께 뒷자석에 앉아 앵커리지 시내로 향하면서 본 풍경들이 캘리포니아의 사막전경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너무나 대조적이고 생경하게 느껴졌다.
“나는 자네가 고향 몬타나에서 형제들과 농장을 경영하며 자리잡고 있으리라 생각했었지. 군대 생활할 때 자네가 들려준 이야기도 있고 해서 말일세.”
“제대하면서 나도 그렇게 살려고 했었는데 스지를 만나 우리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되었지. 고향 몬타나에서는 큰 돈벌이 기회가 없더라구. 그래서 마지막 개척지인 이곳 알라스카에서 한번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하게 된 거지. 농장은 동생들에게 전부 넘겨주고, 칠년 전 이곳으로 와서 건설회사에 근무하다가 이 년 전에 내 사업으로 독립했어. 주택공사를 맡기도 하고 장비대여업도하고 있다네. 스지는 요즈음 백화점에 근무하고 있고. 돈 벌면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야.”
“나도 자네 고향에 한번 꼭 가보고 싶어.”
“암 좋지. 언제라도 자네가 오는 것은 환영이야. 모든 가족들이 그곳에 살고 있으니까.”
“내가 그곳에 가서 정착하면 어떨까?”
나는 생각 없이 불쑥 말을 꺼냈다.
“피제이가 그곳에 가서 살기위해 정착한다면 외로워서 견디기가 어려울 거예요.”
스지가 운전대를 잡은 채 백미러를 보며 말에 끼어들었다. 나는 새삼 그녀의 용모에서 백화점에 근무하는 여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지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나도 그곳에서 태어났지만 코리언은 한명도 보지 못하고 자라났으니까. 일본인과 중국인은 보았지만, 한국인은 서로 싸우면서도 항상 모여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니 자네 혼자서 그곳에서 정착한다는 건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그저 막연한 얘길 해 보았네. 개의치 말게. 그런데 자네는 한국인에 대한 그런 면까지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이곳에도 석유파이프라인 공사가 끝나고 한국인들이 정착을 했다네. 델타라는 곳에 있는 빌리라는 친구는 나처럼 한국에 나가서 근무하다가 한국여자와 결혼했어.”
“참 그렇군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빌리의 부인 순이를 피제이에게 소개해드려요. 빌리 그 양반은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도 잘 만들어요.”
“염려말어. 벌써 빌리와 순이가 피제이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내게 피제이가 도착하면 연락해 달라고 당부를 했지. 그 친구는 부인 때문에 반은 한국인이 되어버렸어..”
“그거 반가운 얘기군. 한번 만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
“다음 주에 베델로 가신다고 하셨지요?”
“네.”
“폴, 피제이가 떠나시기 전에 앤지를 초대해서 함께 식사라도 하는 게 어때요?”
“그거 좋은 생각이야. 내가 미쳐 그 생각을 못했군. 피제이, 생선가게를 하는 앤지라는 한국여인이 있어. 죠오지라는 에스키모 남편과 토기엑이라는 곳에서 사슴목장을 경영하고 있는 데 봄 여름철에는 앵커리지로 나와 혼자서 생선장사를 한다구. 한번 자리를 함께 마련하여 소개해주고 싶네.”
“글세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에스키모와 결혼 한국여자라니 별난 생각이 들어서 호기심이 생기는구만.“
“그게 아니야. 한국여자로서는 여걸일세. 키도 크고 인물도 좋지. 억척스럽기로 따지면 남자 몇 사람 당할 정도야. 뉴욕에서 이곳에 온지 오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남편과는 재혼이라고 하더군.”
 “자네는 그 여자의 신상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어?”
“스지가 레스토랑 매니저로 있을 때 앤지가 생선 납품을 했거든. 그래서 가까워지다 보니 친구가 된 거지. 남편 죠오지와도 우리 집에 가끔 다녀가곤 했어. 죠오지는 주로 토기엑의 목장에서 지내고 있어.”
“자네와도 그렇게 가깝게 지낸다니 한번 꼭 만나서 인사라도 나누고 싶어.”
내가 도착한 날 저녁 폴의 부인 스지가 마련해준 저녁식사를 마치고 밤이 늦도록 마주앉아 지난 날 한국에서의 군생활을 회고하면서 두 사람은 감회에 젖었다.
   그는 한국 남해안의 통신기지에서 근무할 때 주말이면 나와 함께 진해, 마산, 부산 등지로 외출하여 소일하던 추억을 되새기면서 그 당시 가끔 한국군들과 사소한 시비로 갈등이 생겨 난처한 일이 있으면 내가 통역으로 나서서 화해를 주선해주곤 했기 때문에 그의 동료들이 나만은 미워할 수가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듣자 그 당시 상급자나 상사들로부터 눈총을 받고 심지어 사꾸라라는 험담까지 감수해야만 했던 일이 새삼 기억에 새로웠다. 그 내용을 당시에 폴에게 들려주지 않았지만 십 년이나 지나버린 오늘에도 내가 당해야만 했던 모욕적인 험담을 그에게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 그 내용을 설명해준다는 것은 그 당시나 십년이 지난 지금이나 서로의 감정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상급자와 상사들은 내가 미군식당에 드나들고 때로는 맥주나 사소한 생필품을 폴과 그의 동료들로부터 선심으로 받은 것을 시기하는가 하면 미군 PX에서 미제물건을 사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한 두 번은 용기를 내어 폴에게 부탁을 했으나 그 다음부터는 나 자신 스스로가 아예 그런 부탁을 거절하자 눈총을 받는 것은 물론 이려니와 양놈들에게 빌붙어서 혼자서 배에 기름을 채우느니 의리가 없다느니 하고 험담을 듣기도 했다.
  환경변화에서 비롯된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면서 폴과 함께 지낸 이틀 후인 토요일 나는 폴을 따라 바다낚시를 갔다. 왠지 나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낚시나 또는 다른 취미활동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지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낚시는 그야말로 싱겁다는 생각을 했다. 줄낚시를 드리우고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구도자처럼 명상을 하던지 해야하는데 나는 수양을 행하는데 길들여져 있지 않아서인지 나의 적성에는 전혀 맞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폴과 낚시 줄을 드리우고 있다가 이따금 걸려드는 가제미나 명태를 잡으면서 생소한 호기심을 느끼지만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낚시도구를 챙겨 밴트럭에 올라 막 출발하면서 폴은 앤지라는 여인이 경영하는 생선가게에 들려보자고 했다.
“피제이, 돌아가는 길에 스지가 얘기했던 앤지라는 여인을 만나서 인사나 나누지. 아마 좋은 얘기 친구도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자네 집에도 왕래하는 사이라니 한번 만나 보자구.”
나는 미국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동포들이 그저 별다른 차이 없이 그저 그런 거 아니가 생각하며 별 관심 없이 대답했다.
생선가게 앞에 밴을 주차해놓고 폴의 안내로 가게 안에 들어서자 수족관에는 게와 가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활선어가 지열되어 있었고 물고기와 해수에서 풍기는 비린내가 물씬 코끝을 자극해왔다. 폴이 종업원 사내에게 앤지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사무실입구로 다가가 폴이 왔다고 일러 주었다. 잠시 후에 주인으로 보이는 화장기 없는 키 큰 여인이 나왔다.
“폴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세요?” 
“안영하세요? 앤지. 오늘 특별한 손님을 모시고 왔어요. 앤지에게 소개하려고요.”
“특별한 손님이라니요?”
“한국에서 온 손님이 예요. 피제이, 이리 와서 앤지와 인사를 나누라구.”
폴은 수족관을 둘러보고 있는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앤지라는 여인을 보는 순간 그만 말문이 막혔고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안경을 낀 두 눈이 휘둥그레 해지며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니 연지? ,,,,,,,”
“..........”
나는 장승처럼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문 채로 나를 마주 쳐다보았다.
“둘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인가요?”
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벌 갈아 쳐다보자, 어느새 그녀는 두 눈에는 물기가 어린 채 머리를 끄덕이었다. 숨이 막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폴 잠깐 기다리세요.”
그녀는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피제이 어떻게 된 거야? 이거 보통 사이가 아닌 거 같은데 말이야.”
“나중에 얘기하세.”
십여 년 전 그것도 서울의 사직동 어느 요정에서 마지막으로 잠시 보았던 그녀를 이렇게 알라스카에서 여행도중 다시 만나다니 이것은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밖에 달리 생각핳 수가 없었다.  <하나님 맙소사!>를 속으로 수없이 되풀이 했다. 나는 실로 나의 존재가치에 대한 일종의 혼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피제이 내가 자네를 이곳에 데려온 것이 잘 한 일인지 아니면 못할 일을 한 것인지 모르게구만.”
“정말 믿을 수가 없군!”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가 알라스카에서 에스키모 남편과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미끼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 또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폴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대뜸 나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길이 파리하게 떨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나는 가슴 속에 밀려오는 감당못할 충격 때문에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녀는 잠시 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나서 믿어지지 않는 듯 나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지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디에 머물고 계세요?”
“폴과 함께 있어.”
“이곳에는 얼마나 머물 건간요?” 
“다음 주에 베델로 가야 돼. 그곳에 일자리를 얻었어.”
“알라스카에는 혼자 오신 거예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마켓문을 닫고 저녁에 폴의 집으로 찾아오겠다는 그녀와 일단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폴은 아주 시종일관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이었고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몹시궁금해하면서도 맹목적으로 즐기는 눈치였다. 
“글세 대충 짐작은 가는데 두 사람이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군. 그녀의 한국 이름이 뭔가?”
“이름은 연지이고 성은 오씨야.”
“그래? 그럼 한국식 이름이나 미국식 이름이 비슷하군.”
“듣고 보니 그렇군. 
나는 그녀가 과거에 나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폴에게 알려주었고 그는 ‘오 마이 갓’을 연발하며 즐겁다는 표정을 짓는 듯 하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내 정색을 했다. 그는 나의 표정에서 두 사람이 무언가 말하기 힘든 과거의 사연을 지니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는 듯 했다.
“정말 자네가 앤지와 그런 러브스토리를 갖고 있다니 꽤 흥미가 있군, 그 옛날 진한 사랑의 이야기를 간직한 한국의 연인들, 선생님과 제자가 북극 알라스카에서 운명적인 해후를 하다니 말이야. 정말 드라마틱하고 소설적인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겠어.”
폴은 운전대를 잡고 신을 돋우더니 다시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폴 자네는 지금 나의 기분을 헤아리기가 어려워. 나는 지금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만 같아.‘
“그러니 사랑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걸세. 피제이 자네 베델로 가지 말고 여기서 직장을 구하는 게 어때? 앤지도 있으니 외롭지 않을 테고. 내가 도와줄게.”
“이 사람아 앤지는 유부녀야.”
“한국 사람들은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이제는 애인이 아니지만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잖아.”
“그 건 미국식 사고방식이라 할지라도 그게 과연 가능할까?”
폴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뚱하며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사실 그녀를 만나고 보니 베델에 가야하는 의지가 흔들리기 시작했으나 한편으로는 나까야마와의 약속은 지켜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때로는 인생이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극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체험하는 것만 같았다. 나까야마도 십여 년 전 서울에서 그녀를 몇 번이고 만났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자 뇌리에는 무거운 생각이 밀려들어왔다. 
연지를 처음 만나 것은 그녀가 고등학교 이학년 때였다. 군에서 제대한 나는 서울의 D여고 체육교사로 부임하게 되었고, 그녀는 당시에 과외 특별활동으로 고적대원이였는데 키도 크고 미모도 중출한데다가 성격도 활달하였다. 삼학년이 되면서 그녀는 고적대 지휘자가 되어 전교생들은 물론 타교 남학생들 간에도 인기가 대단했다. 
그녀와 내가 가까워진 것은 내가 그녀의 집 부근에서 하숙을 하면서부터 등교시간에 거의 매일 같이 버스정류장이나 버스 안에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총각선생으로 여학생들에게 상당히 인기도 있었지만 때로는 몇몇 여학생들로부터 사제지간의 정도를 지키는데 한계를 느낄 만큼 곤혹스러운 경우를 당할 때도 많았다. 그래서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스승의 날이나 연말연시 같은 명절이면 연정이 담긴 카드와 함께 학생의 신분으로서는 과분한 선물을 보내오고 심지어는 하숙집으로 찾아오기까지 하는 등 때로는 이성으로서 대하는 눈치를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딴전을 부려 넘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연지의 경우 나는 끝까지 사제지간의 거리를 지키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연지가 나의 하숙집에 자주 찾아오는 것을 알고 있던 시샘 많은 어느 동료 여학생이 그녀의 부모에게 일일이 일러 바쳤고 영관장교로 예편했던 완고한 그녀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부모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았고 어떤 행동의 유무를 떠나 변명의 여지없이 그녀의 부모에게 백번 사과하고 무조건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한 뒤 나의 하숙집을 다시금 버젖이 드나들었고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이미 완숙한 여인으로 변모해 있었다. 마침내 그녀와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관계에 빠져들었고 마침내 그녀는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완강하게 나오자 가출을 하겠다고 맞섰지만 직업군인이었던 그녀의 아버지에게 이런 고집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학교에 찾아가 교장과 재단 측에 항의하는 바람에 나는 주위의 여론도 좋지 않고 해서 해고 직전에 스스로 학교를 떠났고 삼년간의 나의 교직생활은 이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다른 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을 수도 있었으나 나는 이 기회에 직업을 바꾸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와의 끈질긴 인연은 이상하게도 다시 이어지곤 했다. 
나는 집안의 중매로 결혼 후에도 교직생활은 그만 두었을 망정 불필요한 자존심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연지와 헤어진 것을 몹시 후회하기도 했다. 연지에게 상처만을 준 것도 나의 잘못이지만 그녀의 아버지와 용기있게 맞서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러운 일이었다. 
연지를 처음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내 아내가 첫 아이를 낳은 영동의 어느 산부인과 병원에서였다.
어머니로부터 아내가 출산예정일보다 앞당겨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화로 연락받은 나는 회사를 뛰쳐나와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아내의 입원실 앞에 이르러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마저도 잊어버릴 만큼 충격을 받았다. 내 눈 앞에 어머니와 함께 입원실을 나서는 간호원은 다름 아닌 연지가 아닌가. 나는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간호원 유니폼을 입은 여인이 연지가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것은 엄연한 사실이자 현실이었다. 세상에 이런 가혹한 인연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소리치고 싶은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어머, 박 선생님....”
“그 순간 우리 사이에는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무겁고 섬득한 전율이 덮쳐왔다.
“아니 두 사람이 잘 아는 사인인가?”
어머니는 두 사람의 표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예. 제가 학교에 있을 때 제자였습니다.”
“아이고 그렇게 되었구만. 세상에 선생과 제자가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정말 반갑기도 하지만 예사 인연이 아니군. 제자가 선생 부인의 산바는질 맡았으니 말이야.” 
어머니는 두 손을 마주치며 그저 기분대로 큰소리로 지껄였다. 나는 연지에 대한 부질없는 죄책감 때문에 몸들 바를 모르는데 그녀는 직업적인 감각으로 재빨리 분위기를 바로 잡아나갔다. 
“선생님 정말 뜻밖이고 반갑습니다. 그리고 득남하셨으니 축하드립니다. 어서 들어가 보세요. 첫 아이 분만으로서는 순산입니다. 산모의 산후회복도 빠를 겁니다.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그녀는 재빨리 임상기록카드를 들고 복도를 빠져나갔다. 나는 입원실로 들어가 탈진한 상태로 누워있는 아내의 손을 잡고 수고 많았다는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도 누군가가 뒤통수에 대고 주먹질을 하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연지가 지금의 아내처럼 내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다는 망상을 하면서 내심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썼다
나는 그날 밤 연지의 퇴근시간에 맞춰 병원 부근의 지하다방에서 그녀와 잠시 만날 기회를 얻었다. 그녀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만 같아 내가 먼저 그녀에게 만나자고 요청했다. 나의 내면에는 첫 아이를 얻었다는 들뜬 기분과 그녀에 대한 비굴한 죄책감이 야릇한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내 전생의 업보가 아니라면 어찌 연지가 내 아내의 산바느질까지 맡아야하는 것일까 하는 상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연지가 간호원이 되어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믿어지지 않는군.”
“사람들은 흔히 운명이니 팔자소관이니 하는 말을 잘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만나 어떻게 헤어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선생님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별 어려움 없이 지냈고 무역회사에서 직장인으로 지내고 있어.”
“그리고 장가도 들어서 이제 자식도 얻어 가장이 되셨잖아요. 그게 중요한 것 아닌가요?”
연지의 그 말속에는 나에 대한 원망과 그녀 자신에 대한 자조가 섞여있음이 분명했다.
“......”
“기구한 운명이니 팔자니 하는 말은 그저 속된 표현이려니 생각했는데 저도 이제는 그 말뜻을 실감할 것 같네요.”
“나도 동감이야.”
“제가 아까 재만 씨를 만나고 난 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으시겠어요?” 하고 그녀는 잠시 무거운 표정으로 눈을 내리 깔았다. 그리고는 지난날 그녀의 표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시니컬한 웃음이 순간적으로 살짝 그녀의 입가에 스쳐갔다.
“내가 진작이 이렇게 재만 씨의 아이를 낳았어야 했는데 하고 말입니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저는 재만 씨의 우유부단했던 성격이 얼마나 원망스럽고 미웠는지 아세요? 재만 씨에게는 체면이나 자존심 그리고 주위의 여론이 애정보다 얼마나 더 중요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진정한 자존심은 자신의 양심과 감정에 충실하게 처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절실히 깨달았어요. 재만 씨의 아이를 받아낸 지금에 와서 말입니다.”
그녀는 또 다시 말을 멈추고 감정을 자제하는 모습이 뚜렷했다. 나는 가슴이 옥죄어왔다. 나는 그녀의 가슴속에 잉태되고 있는 감정과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있어.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후회하는 마음이 절실했지만 이미...”
“이미 때는 지나갔다 이거지요. 내가 재만 씨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 함께 도망가자고 하니까 자지러지게 놀라던 재만 씨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해요.”
“그만해!” 
나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외쳤다.
“기분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결국 재만 씨의 충격 때문에 저는 보호자의 동행도 없이 산부인과에 가서 혼자 유산을 시켜야만 했어요. 밖에서 남몰래 기다리던 재만 씨를 만나 위로를 받았지만 그날 밤 저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나 아까 병원에서 만났을 때 이건 마치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어요.”
그녀의 눈은 이미 물기에 젖어있었다.
뜻밖에 만난 그녀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비굴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다방을 나와 밤거리를 한동안 걸었다. 늦가을 밤 의 차가운 기온이 두 사람의 기분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를 길가의 포장마차로 안내했고 그녀 역시 어색함이 없었다. 이미 과거에 두 사람이 가끔 가질 수 있었던 습관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끈한 우동과 오뎅을 주문하고 소주를 한 병 곁들였다. 그녀의 기분이 다방에서 보다는 한결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녀는 지난날의 경우처럼 나의 술잔에 먼저 술을 따라주었고 나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음미하는 그녀의 눈길은 깊고 깊은 연민의 계곡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그녀와 여러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고 만나면 스탠드바에서 맥주를 나누기도 하고 조용한 경양식 집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그녀 쪽에서 먼저 소식을 끊어버렸다. 그녀가 병원의 간호원 일자리를 그만 두었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막연한 그리움 때문에 애를 태우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그녀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회사에서 벌써 과장자리로 승진해 있었고 직장인으로서 야심과 함께 의욕적인 생활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든 어느 날 회사와의 거래관계로 나와 접촉이 많은 일본인 바이어 나까야마 진따로가 업무관계로 방문했을 때 나는 그와 그의 일행을 접대해야 할 일 이 생겼다. 그날 저녁 내가 식사준비를 하겠다고 하자 뜻밖에 그는 자기가 잘 아는 기생요정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자고 제안을 했다. 나는 바이어인 그의 제안을 쾌히 받아들였고 그가 이미 내밀하게 예약을 해둔 사직동 어는 기생집으로 갔다. 나까야마 일행과 함께 요정에 도착했을 때 주인마담은 나까야마를 마치 칙사라도 맞이하듯 비굴하리만치 모셔 들였고 곧이어 일행이 예약된 방에 안내되어 좌정하고 잠시 대기하자 주안상이 들여지고 주인마담은 한복을 차려입은 기생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 몇번을 다시 태어난다해도 경험해보지 못할 것만 같은 절망과 후회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나까야마가 초조하게 기다리던 기생이 바로 연지가 아니던가. 문               앞에 들어서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백지처럼 풀리는 나까야마의 눈빛을 보고 나는 소리치고 뛰쳐나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   가슴속 깊이 할퀴듯이 흘러내리는 뜨거운 육감이 오장육부까지 녹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고통은 이내 전신의 경련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긴장한 채 조용히 뒷걸음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나까야마와 마담은 무언가 서로 이상하다는 눈길을 주고 받았다.  연지는 끝내 그 자리에 다시 돌아오지않았고 나는 그날밤 나까야마를 위한 유흥을 가시방석 같은 불편한 심기로 감내해야만했다.  그 후 몇번이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연락을 취했지만 그녀는 냉정하고 간단하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자기와 한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각오와 준비가 되어있다면 만나겠으나 그렇치않다면  두번다시 찾지말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녀와는 소식이 완전히 끊어졌고, 그후 일년도 채 않되어 우연한 기회에 만난 그녀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로부터 그녀가 미군 “지 아이”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야룻한 분노와 함께 일종의 자책감으로 몇일동안 퇴근시간마다 술을 마시고 취하며 자위를했다. 그리고 십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는 기억속의 한 구석에  낡고 퇴색한  한장의 사진처럼 추억의 여인으로 남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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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하순인데도 북극의 저녁은 벌써 어둠을 비켜서는 늑장을 부리고 있는것만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폴의 집 거실에 앉아 창밖을 자주 내다보면서 앤지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몇일후면 나까야마와 약속한대로 베델에 갈 생각을하니 미묘한 갈등이 밀려왔다.  떠난다는 것 그리고 머문다는 것은 삶의 철학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결국 인간은 운명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피제이,앤지를 기다리시는 건가요? 나는 스지가 옆에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 그래요. 폴한테 얘기듣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소설같은 얘기가 이렇게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구나 생각했어요. 차라리 소설이라면 이해하고 문제삼을 것이 없겠지요. 모든 것이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요. 두 사람이 모두 당황했겠지요. 그러나 지난날의 모든 기억들을 서로 추억으로 아름답게 간직할 수만 있다면 가치는 그만큼 있다고 생각해요. 스지의 말이 내 감정에 별로 깊이 와 닿지를 않았다.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안고 고민은 할망정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각자가 자기만의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속성일까. 앤지가 왔어요. 스지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자. 나는 코발트색 밴트럭이 폴의 집 앞에 멈춰서는 것을 보고 앤지의 모습을 확인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앤지와 함께 외출하시려고요? 네 앤지와 얘기 나누시고 함께 집으로 오세요. 기다리겠어요. 그러지요. 건성으로 대답하며 황급히 나가 그녀의 밴트럭에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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랐다. 한동안 서로 말머리를 찾지 못하고 달리는 차안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기우는 태양빛이 반사되는  해안포구를 끼고 계속 차를 몰았다. 미국에 와서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그녀는 운전대를 잡고 전방만을 주시한 채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베델에 일자리을 얻어 가신다고 했는데 알라스카에는 언제까지 계실 계획 인가요? 좀더 경험해  보고 나서 결정하려구. 그럼 주재원 근무는 끝난 건가요? 그런 셈이지. 그럼 귀국하지 않고 알라스카에는 어떻게 오시게 됐어요? 그 점이 궁금하군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한동안 착잡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그 동안 잃어버렸언 자신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도시의 이기적인 소시민이 설 땅을 결국 설계된 도시의 그늘 밑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현실도피라고 봐도 될까요? 그보다는 자신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봐줬으면 좋겠군. 하긴 저도 알라스카에 올때는 그럼 심정으로 왔다고 봐야지요. 그러나 저러나 어떻게 견디시겠어요? 가족없이 남자가 혼자서 견디기가 어려운 곳이 바로 알라스카예요. 삼 년 전부터 이곳 앵커리지에 나와서 생선가계를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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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는 어디에 살았는데? 버지니아와 뉴욕에서 살았지요. 알라스카로 오기 전엔 절망적인 생각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갈까 마음 먹은 적도 있었지만 한국을 떠나올 때 처지를 생각하니 그럴 수는 없었어요. 오히려 이곳이 내 인생의 마지막 정착지라고 굳게 결심하고 왔지요. 그녀는 말을 중단하고 잠시 감정을 자제하는 듯 입술을 가볍게 다물었다. 수평선에 가득한 노을은 손에 잡힐 듯 눈 앞에 가까왔고 수면에 반사되는 빛의  잔광이 눈부셨다. 대지진으로 지반이 내려앉은 해안 도로변에는 잿빛으로 죽은 나무들이 쓰러져 있거나 그대로 우뚝 선 채로 즐비했다. 한참동안 대화가 중단된 채 달리다 보니 빙산이 뒤덮인 계곡을 지나면서 수정처럼 투명한 빙벽이 마치 무대의 세트 장면처럼 시야에 펼쳐졌다. 한 시간 정도 다시 산림 사이로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지나 작은 포구에 자리잡은 조용한 어촌을 가로질러 방파제에 이르자 그녀는 차를 멈추었다. 포구 건너편에 병풍처 럼 드리운 숲이 울창하고 가파른 산은 역시 무대 위에 놓여져 밀려왔고 전신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춥지 않으세요? 한기는 있어도 상쾌하군.아주 아늑해 보이는 곳이데. 언제나 아늑하고 평화러워 보이는 포구예요.그러아 이곳도 수난의 역사가 깃든 곳이기도 하지요. 러시아가 알라스카를 지배하던 때에는 러시아 함대가 출입하며 원주민들로 부터 자원을  착취해 가는 기지로 사용했나봐요. 그리고 이차 대전 때는 요지로 사용하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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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아름다운 전경을 보니 전혀 그런 사실에는 실감이 가질 않는군. 저도 동감이예요. 저기 건너에 보이는 산이며 떠오르는 달 모양이 마치 연극 무대의 세트 같군. 알라스카를 여행하다보면 가는 곳마다 태고의 원시적인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듯한 생각을 하게 되지요. 이따금씩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걷기만 했다. 누가 먼저 말머리를 끄집어내든 필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시작되면 감당못할 것 같은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밀려올것 같았다. 선생님. 그녀는 정색한 표정으로 멈춰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깊고 커다란 그녀의 눈빛을 보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듯 떨려왔다. 차를 타고 오면서 저는 어리석은 갈등으로 시달렸어요. 당신을 과거의 선생님으로만 생각할 수 없을까 하고 말이예요. 그럴수록 더욱 내 자신이 불쌍하게만 여겨지더군요. 이곳 알라스카는 저 자신 스스로가 유배지라고 생각하고 죽을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는 변함이 없지만 내 스스로가 찾아온 이 유배지에서 오늘처럼 슬픈 날은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자 애인이었던 당신을 다시 만남으로써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어버렸다고 생각한 과거의 자 자신이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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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 스스로가 유배지를 찾아왔다고 생각한다면 과거를 현실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구. 물론 과거가 현실을 속박한다면 그처럼 불행한 일은 없겠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과거가 어쩔 수 없는 삶의 전부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니까요. 오늘 저는 재만씨와의 과거가 살아있는 현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발견했어요.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할 수도, 잘못된 생각이라고 설득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서로가 다시 만났다는 것은 슬프고 불행한 일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연지, 꽤많은 시간이 흘렀어. 어쩌면 시간이 아니라 세월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일지도 몰라. 지금 일시적으로는 과거에 얽매일 수도 있으나 그동안 우리 자신들이 쌓아온 삶이 오늘의 현실을 지켜주고 내일을 이끌어줄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해. 마치 선생님으로서 충고의 막씀을 하시는 것 같군요. 물론 한국을 떠 나올 때 저는 미국 땅에서 다시 태어나는 각오로 새상을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수없이 했어요. 그것은 나에게 닥쳐오는 부정적인 현실을 향한 도전이기도 하면서 도피적인 자신의 비굴함에 대한 자위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저는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미군 병사의 아내가 된것을 조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어요. 오히려 사회의 퇴폐한 환경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자신을 구하는 최선의 선택으로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재만씨를 찾아가 구차스럽게 애걸을 했던지 아니면 더 철저하게 타락의 수렁에 빠져들어 버렸을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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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포구에는 어둠이 깃들고 선창의 불빛이 수면에 반사되어 어른거렸다. 그 순간 그녀의 모습에서 화사하게 피어나던 학창시절의 출중한 미모를 엿볼 수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자 마음이 한없이 여리어졌다.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하고 싶군. 제가 너무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여 술은 제가 대접하겠어요. 선창 쪽에 가면 조그마한 칵테일 바가 하나 있어요. 그녀와 함께 칵테일 바에 들어서자 조명이 어두운 조그마한 실내에는 컴퓨터 뮤지박스에서 ‘케니 로저스’의 노래가 감미롭게 흘러나오고 있었고 오십 대에 가까운 남녀 한 쌍이 깊게 포옹을 한 채 홀 한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카은터에 앉아 와인을 시켜놓고 서로 긴장을 풀어보려고 애를 썼다.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 의미는 홋날 생각하기로하고 아무튼 반가운 마음으로 축배해요. 그녀는 잔을 들었다. 나도 잔을 들어 함께 축배를 하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나는 내심 그녀의 미국 생활이 궁금하여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보았다. 그런데 버지니아나 뉴욕에 살다가 알라스카로 이주한다는 것은 어쩌면 한국에서 이민 오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은데. 여러 가지로 궁금하시겠지여. 저의 미국 생활에 대해서. 그렇지만, 생각보다는 단순해요. 처음에 미군병사인 남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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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그가 전속하게 된 부대가  있는 버지니아로 갔었지요. 그곳에서 그는 제대를 했고 저는 처음에 언어소통이 잘 되지 않아 병원 호텔 등에서 청소부 일도 하다가 다음에는 남편은 제대로 돈벌이도 못하고 오히려 내게 생활을 의존하며 술이나 마시면서 반 건달처럼 세월만 보내더니 얼마 안가서 스스로 가출을 하더군요. 물론 저의 냉정한 태도에도있었어요. 이혼을 하고 혼자가 되고 전자부품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어 아이와 함께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지요. 그녀는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술장을 홀짝 비우며 다시 바텐더에게 와인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담배를 피워 물며 꽤나 침착해지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직장에서 문제가 생긴 게예요. 내가 소속해 있는 작업반의 조장으로 있는 체격 좋은 백인 여자가 나에게 인종차별적인 언동을 가끔씩 서슴치 않았거든요. 어떤 때는 열심히 일하며 윗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것을 시기하여 노랑둥이가 출세해 봤자 어디까지 올라가겠느냐고 빈정대기 일쑤였고 상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해 봤자 그때 뿐 적당히 넘어가곤 했지요. 그래서 늘 앙갚음을 해 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차에 하루는 퇴근길에 그녀가 그날 따라 집으로 돌아갈 자동차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내가 선심을 쓰는 체하고 유인을 한 거지요. 내가 집에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말예요. 나는 그녀를 차에 태워 공장을 빠져나와 한적한길가에다 차를 세우고 그녀를 차밖으로 끌어 내렸어요. 그리고는 따졌습니다. 앞으로 다시 내게 모욕적인 언동을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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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인지 아닌지. 그랬더니 자기보다도 체구가 왜소해 보이는 내가 만만하게 보였던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우습게 보아 넘기더군요. 다짐을 안하면 죽든 살든 결판을 내겠다고 했더니 해 보자는 배짱으로 나오더군요. 저는 그녀의 머리채를 두 손으로 끌어 잡고 죽을 힘을 다해 땅바닥에 넘어뜨리고는 그 거구 위에 올라타서 마구 치고 때렸어요. 분이풀릴 때까지. 그녀는 신음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나는 그녀를 깔고 앉은 채로 다시는 내게 모욕적인 언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지요. 그러나 내 생각과 순간적인 행동은 그렇게 끝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녀가 돌아서서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저는 경찰에 구속되었고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지만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어요. 그만하길 다행이었어요. 저는 그 고장에서 직장을 찾기가 어렵게 되어 뉴욕으로 안주를 한 다음, 유태인 생선 가게에서 그리고 한국인 야채 가게에서 캐쉬어 일도 보고 때로는 밴트럭을 물고 배달도 하는 노동을 하기도 했지요. 미국인 한국인 할것 없 이 맗은 남자들의 유혹도 받았고 정말 돈 맗은 남자들이 접근할 때는 자신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더군요. 때로는 신변의 위험 때문에 자동차에 권총을 숨겨가기고 다닌 적도 있었어요. 그때부터 술을 마시는 것이 아주습관이 되어 이제는 술 없이는 견딜 수가 없게 돼버렸고요. 그녀는 와인 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 다시 술을 주문했다. 나는 머리가 텅 미어있는 듯한 느낌으로 그녀가 아닌 낯선 어느 여인의 과거를 듣는 것만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해 존 적인 있었지만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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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올 때의 처지를 돌이켜보니 죽기보다 싫더군요. 그래서 도시에서의 이기적인 삶을 등지고 딸 아이를 데리고 알라스카에 온 게예요. 그러나 생각보다는 이곳의 생활도 처음에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생선 가게 일을 하다가 주인의 소개로 알게 된 죠오지라는 에스키모 사내와 재혼을 했어요. 에스키모지만 교육도 제대로 받았고 토기엒이라는 곳에 사슴농장을 가지고 있어요. 생활은 그런대로 아쉬운 것 없을 정도지만 내가 오지에 있는 사슴농장에서 외로울까봐 제가 원하는대로 앵커리지에 생선 가게도 마련해 주었어요. 뼈없이 착한 사람이지요. 그러자 저에게는 다시금 마음속에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텅빈 공간이 자리를 하고있는 거예요. 그 공간을 술로 메꾸려고 해보았으나 되질 않더군요. 잠시 뿐이지요. 그러면서도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럴수록 그 공간은 점점 확대되어 가고요. 그녀는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어느새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을 채 할 말을 잃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알콜중독은 말할 것 없고 어쩌면 우울증에 빠진 것만 같아 가슴이 아팠고 뜻밖에 외지에서 여행 도중 만난 그녀에게 보상할 수 없는 과게에 대한  죄책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그녀와 바닷가에 세워둔 밴트럭에서 밤을 세웠다. 술에 취한 그녀가 바닷가에 세워둔 밴트럭에서 밤을 세웠다. 술에 취한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 나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잠이 들기도 했고 나는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이른 아침 ‘스월드’의  어촌을 떠나올 때 그녀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사들고 차에 올랐다. 따끈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순산 체내에 깊숙이 스며들었덩 새벽의 한기가 일시에 녹아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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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 같았고 나른한 시야에 아침 햇살이 따사롭게 와 닿자 상쾌한 기분이 지난 밤의 슬픈 이야기들을 기억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피곤하시죠. 그녀는 가석 페달을 밟아 본 도로에 들어서며 상기되고 피로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보다는 연지가 얼굴이 핼쓱해 보이는데. 저야 습관적으로 겪는 경우가 많으니까 조금 쉬면 괜찮아요. 아침 커피맛이 기분을 완전히 전환시키는 것 같군. 오래만에 커피 맛을 몸으로 느껴보는데. 밤새 추위를 느끼셨나 봐요. 그랬나? 나는 커피를 크게 몇 모금 마시면서 공복의 한기에서 완전히벗어났다. 지난 저녁에 달려왔던 똑같은 그 길을 돌아가면서도 시야에 들어오는 전경은 그 느낌이 너무나 대도적이었다. 아침햇살을 듬뿍 먹고 살아 숨쉬는 듯한 숲이라든가 눈 녹은 양지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피어있고 질주해 가는 자동차에도 아랑곳없이 산토끼들이 줄을 지어 도로변을 달음박질하기도 했다. 나는 시야에 들어오는 자연을 음미하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북극이라도 역시 계절은 꼬박 찾아오는군. 그러믄요. 비록 그 기간이 짧은 것 뿐이지 봄 여름 가을이다 있지요. 여름에 꽃들이 잠시 피었다가 지는 것을 보면 어떤 때는 몹시 아쉽기도 하지요. 혹시 알라스카를 상징하는 꽃이름이 뭔지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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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는데. 물망초예요.  그래? 왜 하필이면 물망초일까? 춥고 어두운 긴 겨울을 지나더라도 봄이면 그 생명을 재생시키는 절개를 잊지 말아 달라는 뜻도 되겠고 북극을 잠시 거쳐가는 나그네같은 사람들이 많다보니 물망초를 상징 적으로 내세눈 것 같아요. 긴 어둠만이 계속되는 겨울 동안 북극의 대지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그리움에 시달리고 있는 지도 모르지요. 그녀는 스스로가 이곳 알라스카를 자신의 유배지라고 표현했기때문이었다. 그 유배지에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첫사랑의 남자를 만나다니, 나는 그녀가 겪고 있는 그리움과 현실의 갈등을 헤어려보며 때로 환상을 현실로 맞이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핼쑥해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나의 시선을 새삼스럽게 감당하기 어려운 듯 정면을 주시했다.재미있는 표현이군. 어쩌면 우리의 인생 전부가 어떤 그리움에 시달리고 있는지도 몰라.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끝없이 기다리고 갈구하고…… 그래. 그리움을 가진다는 것은 끝없는 자기의 발견일 수도 있으니까. 맞아요. 그 그리움이라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고요. 그녀의 말투는 단호한 듯 하면서도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를 생각하는자 여운을 남기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남은 커피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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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막으로 한입에 마셔 버렸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스스로 찾아온 유배지의 아침을 달리면서 서로가 현실로 맞이한 그리움에 깊히 빠져 있었다. 앤지와 스월드 포구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온 후에도 저녁시간이면 나는 그녀를 만나 식사를 하거나 아니면 칵테일바에서 술을 마기기도 하며 소일했다. 그런데 내가 베델로 떠나기 불과 사흘을 앞두고 있던 저녁에 앤지는 폴에게 전화하여 그의 집을 방문하겠다고 연락했다. 그러나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그녀가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남편 죠오지를 데리고 나타난것이었다. 폴이나 그의 부인 스지도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그녀가 죠오지라는 에스키모 사내를 데리고 폴의 집 거실에 들어서며 남편이라고 고개하는 순간, 이해하기 힘든 막연한 혐오감까지 일어났다. 미스터 박, 정말 반갑습니다. 앤지의 선생님이셨다구요? 예 그렇습니다. 뵙게되어 반갑군요. 나는 어정쩡한 기분으로 그가 힘있게 내민 손을 잡았다. 알라스카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는 어정쩡한 기분으로 그가 힘있게 내민 손을 잡았다. 우람한 체격에  동양인과는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의 용모와 황갈색의 검은 피부가 한국의 시골농부에게서 느낄 수 있는 모습그대로였다. 죠오지, 이번에는 앵커리지에 오랜만에 나오셨군요. 폴 역시 예고없는 죠오지의  방문으로 나를 의식하는 듯 민첩한 시선으로 내 표정을 살폈다. 앤지도 궁금하고 마켓도 볼 겸 나왔는데 마침 앤지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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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님이 한국에서 오셨다니 저도 뵙고 인사를 드려야지요. 그리고 알라스카까지 오셨는데 저의 목장에 초대하려고요. 내일이라도 당장 저의 목장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죠오지는 컬컬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예요. 어때요? 피제이 이왕이면 베델로 떠나기 전에 죠오지의 목장에 한번 다녀오시는 것이. 스지가 분의기를 살피는 듯 각자의 표정이 일일이 둘러보았다. 다들 함께 가요. 앤지가 대꾸했다. 그럼요. 다들 함께 요셔야 합니다. 두손을 벌리고 호탕한 몸짓을 하는 죠오지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무엇인가 모르게 위축감을 느꼈다. 피제이 어떤가? 내 세스나기 타고 여행도 해보고 사슴목장도 둘러보면서 말일세. 죠오지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폴이 분위기를 잘 주도해 나간다고 생각해며 죠오지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앤지의 마음을 진정 어떻게 헤아려야할지 생각하니 때 아닌 두통이 몰려왔다. 죠오지는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토기엑에서 함께 시장을 보러나온 친구들을 만나 식품과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 가지고 다음날 아침 익찍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앤지 역시 다음날 아침에 폴의 세스나기가 있는 데포에서 만나자고 하며 그저 차분한 표정으로 떠났다. 앤지와 죠오지가 떠난 후 폴은,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눈치를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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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제이 자네가 약간은 당황했을 것 같아. 미련할 정도로 사람이 착해요. 대부분의 에스키모들중에 그래도 비교적 생활이 안정된 사람들은 서로들 그룹을 지어 세스나기 또는 헬기를 대절해 가지고 도시로 나와 나들이도 할 겸 시장을 보기도 하지요. 생각보다는 굉장히 낭만적인 사람들이라고요. 스지는 나를 이해시키고 감정 을 어루만져주려고 했다. 약속대로 폴 부부와 내가 앵커리지 교외에 있는 소형 자가용 전용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앤지는 먼저 그곳에 나와 휴게실 커피숍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폴은 앤지를 만나자 이왕에 일행이 세스나기를 타고 토기엑으로 갈 바에는 나에게 빙산을 둘러보겠끔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자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그에게 그런 부탁을 할 생각이었다고 말하며 만족스러워했다. 역시 폴은 생각이 항상 깊은 것 같아요. 피제이 내가 먼저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더라면 앤지가 무척 섭섭할 뻔했군. 폴은 두 손을 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걸 가지고 이심전심이라고 하잖아요.  그녀는 지나가는 시선으로 나의 표정을 음미했다. 그녀와 만난 동안 그녀의 표정 중 처음으로 밝아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상에 나타나는 몽타쥬처럼 나의 의식은 서로의 과거를 함께 묻어두었던 망각의 계곡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나가기 마련이었다. 때로는 상처를 주기고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면서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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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길을 묵묵히 걷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우리 의 경우는 그렇게 묵묵히 걷기만 할 수 없었다. 애정의 상흔을 함께 지닌 사람들이라면 그 아픔들은 결코 어느 한쪽의 것만으로 생각하고 망각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제와서 다시 진한 애증의 기억들이 알알이 묻혀있는 과거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은 또다른 하나의 상처를 만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대기시켜 놓은 그의 자가용 세스나기에 올랐다.  
처음으로 소형 세스나기를 탑승해본다는 기분에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 마저도 없지 않았다. 조정간을 잡은 폴의 옆자리에 그의 부인 수지가 앉았고 나와 앤지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뒷 자리에 앉았다.
“피제이 소형 세스나기라고 불안해하지 말게. 어떤 사람은 처음 세스나기를 타면 멀미를 하고 구토까지 한다구.”
 폴이 엔진의 시동을 걸자 여지없이 소음이 고막을 질타해왔고 진동이 심했으나 잠시 후 활주로 이륙지점으로 이동해가자 오히려 기분이 상쾌해짐을 느꼈다.
 폴은 이륙지점에서 잠시 대기하여 관제탑과 간단히 수화를 주고 받았고 이륙허가를 받자 활주로를 전진해 나갔다. 세스나기가 심한  진동을 일으키는 듯 하더니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는 세스나기가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을때 옆에 앉아 있는 앤지를 의식하며 바라보았고 그제서야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꼭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없이 잠자코 있던 그녀는 무엇인가 나와 교감을 하고 있었다는 듯 두손으로 나의 한쪽 손을 포개어 잡고 그녀의 품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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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한순간 눈을 감고 지긋이 힘을 주며 입술을 다물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격정을 억누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시야에 확연히 잡혀오는 산림평야에는 띠엄띠엄 떨어져 있는 집들이 보이고 겨울잠에 묻혀있던 대지에는 따사로운 봄의 햇살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피제이,기분이 어떤가? 세스나기에서 내려다본 알라스카의 대지가 말일세”
“생각보다 평야가 광활하군. 너무나 인상적이라구.”
폴에게 대꾸하면서도 앤지의 손길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눈길을 딴곳에 두고 있다가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순간 그녀의 눈빛은 촉촉히 젖어 있었고 어설픈 미소가 입가에 번져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떨구며 나의 손을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아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이 떨리고 있었고 어둠 저편에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차가운 대기의 허공에 빛이 되어 너울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 역시 삼키고 씹어버리기만 했던 뜨거운 기억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녀를 서서히 감싸안았다.
“알고있어. 우리는 아직도 같은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연지가 찾아온 유배의 땅에서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난거야. 그리고 시작도 끝도 없는 기억들은 우리들을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거야. 하늘 아래 우리가 평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 나 역시 땅끝 어디에선가 자신을 유배시킬 각오만 되었으면 오히려 괴롭지 않을거야.”
“쉿… 그만하세요. 당신이  이 순간만이라도 나를 진정으로 놓아주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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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지 않다면 그것으로 만족해. 당신까지 내가 가고 있는 유형의 길로 끌어 들이고 싶지않아요.”
 그녀는 아예 나의 품에 얼굴을 깊이 묻어버렸다.
 폴은 계곡을 들어서다가 짙은 구름을 만나면 수직으로 비행기를 상승시키고 다시 항로를 살피곤 했다. 그럴때마나다 나는 순간적인 전율을 느끼며 멀리 지상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에 폴은 고도를 낮추며 넓고 깊은 계곡을 향해 비행을 하기 시작했다.
“피제이 내려다 보라고 이제부터 빙산계곡으로 들어서는 거야.”
눈 아래로는 수정같이 맑은 빙산이 산해처럼 펼쳐져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는 하얀 빙산은 하늘빛 수정 색채를 듬뿍 머금고 있었고 실로 장관을 이루며 자연과 그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저 수정처럼 반사되는 빙산을 보면 어떤 때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어요,”
 앤지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공감을 느꼈다.
시각적으로 꽤나 유혹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폴은 곡예비행을 하듯 빙산계곡을 돌며 수직저공과 상승비행을 몇 차례 하고 난 후 앤지에게 물었다.
“ 앤지 이제 됐어요 ?”
“재만씨는 어때요. 더 구경 하시겠어요 ?”
“이만하면 충분해.”
“이제 방향을 토기엑으로 돌리세요.”
폴은 기수를 서쪽으로 돌리며 고공으로 상승했다. 그리고는 북극의 하늘을 가르듯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며 비행을 계속했다.
  토기엑의 사슴목장에 이르렀을 때 폴은 사슴떼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초원위를 두어 번 선회하며 착륙지점을 살폈고 어느새 죠오지가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며 세스나기가 안착할 수 있는 풀밭에 간단히 세스나기를 착륙시켰다. 바퀴가 지면에 닿는순간 진동은 심했으나 생각보다는 착륙하는 것이 너무나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죠오지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와 일행을 맞이했고 앤지의 딸 리자가 엄마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일단 목장 주변을 관심있게 둘러보았다.
  서쪽으로는 능선이 완만한 작은 숲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바다가 보였다.
집앞에서 완만하게 경사진 넓은 목장에는 방목을 하는 암갈색 레인디어(rein deer)들이 한가롭게 무리를 지어 흩어져 있고, 한 눈에 수백 마리가 넘는 것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멀리 산속의 계곡에는 흰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채 여름의 태양을 기다리고 있었고 양지바른 곳에는 대지에 스며든 봄의 손길이 푸른 잡초들을 조금씩  키워내고 있었다. 아직은 인색하리만큼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요.”
죠오지가 일행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래도 미스터 박에게 빙산구경까지 시켜드리고 왔어요.”
스지가 먼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랬어요? 빙산은 처음 보셨나요?”
죠오지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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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죠. 좋은 구경이였어요.”
앤지는 몇 걸음 앞에 나아가 뛰어오는 리자를 끌어 안으며 두 볼에 입을 맞춘다음 아줌마와 아저씨들한테 인사를 하라고 일렀다.
  인형처럼 귀여운 혼혈아인 앤지의 딸을 보는순간 가슴을 스치는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어린 리자의 모습에서 얼굴도 모르고 피부색도 다른 미국인 사내의 모습을 더듬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사내가 아닌 에스키모인 죠오지가 앤지와 그녀의 딸 옆에 있었다.
  이 북극의 하늘 아래서 과거의 여인과 삶의 분신이랄 수 있는 그녀의 어린 딸을 만나야 하는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결국은 헤어져야 했던 과거 때문에 나는 스스로 죄책감을 느꼈지만, 겉으로 드러난 앤지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옛 남자를 다시 자신의 삶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편안함을 준 것일까.
우리들의 삶에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고 무엇이 지워져야 하는지 몰랐지만 같이 있음으로 행복한 것은 사실이었다.
“폴 아저씨, 스지 아줌마, 안녕하세요?”
  리자는 엄마의 손을 잡고 폴 부부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 이 아저씨한테도 인사해야지. 피제이라고 하는 한국에서 오신 아저씨란다.”
  스지가 나를 가리키자 리자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나를 쳐다 보았다.
“ 리자야 만나서 반갑구나. 정말 예쁘게 생겼구나.”
나는 앤지의 손을 잡고 있는 리자의 빰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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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 정말 한국에서 왔어요?”
“그래.”
“우리엄마도 한국서 왔어요. 그렇지 ? 엄마. “
“그래”
“그런데 이 아저씨는 누구야 ?”
“엄마랑 옛날부터 친구야.”
“그래 옛날부터 친구였어. 리자는 한국에 가봤니?”
  미국에서 태어난 혼혈아에게 한국과 미국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잠재의식
속에 있는 일종의 편견일 수도 있었다.
“아니요. 나중에 크면 엄마가 데려다 준다고 했어요’”
이말을 듣고 나니 아이에게 어떤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가르쳐 주었는지는 몰라도 어린애 자신은 한국인과 미국인의 피가 반반씩 섞여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 자신의 것 이라기보다는 앤지가 지니고 있는 현실적인 의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앤지가 한국에서 내 아이를 임신했을때 그녀는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유산을 강요했다. 그런 내가 ‘반은 한국인 반은 미국인(half-korean,half-american)이라고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는 혼혈아 앞에서 편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임신한 몸으로 잠적해버린 앤지를 찾아내어 완강히 거부하는 그녀를 설득하여 산부인과 병원으로 데려가 끝내 유산을 하게 만들었던 내 자신이 훗날 그녀가 혼혈아를 낳았다고 해서 수치심을 갖는다면 양심적으로 더 큰 죄악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내 아이를 낳게 해주었더라면 그녀의 손을 잡고 내앞에 서 있는 혼혈아는 이 세상에 태어 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의 삶에 끼어들려는                                                                                                    75

그 순간부터 운명적인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닌가하는 망상에 젖기도 했다.
“리자는 정말 똑똑하고 예쁘구나.”
  서글픔을 느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앤지는 나를 쳐다보며 이해못할 미소를 흘리고는 이내 초연한 표정을 지었다. 걸음을 옮겨 그녀와 함께 목장의 케빈을 향해 걸어갔다.
“저렇게 많은 사슴들을 겨울에는 어떻게 사육하지?”
“먹이를 많이 준비해 두지요. 봄이 오면 저렇게 방목을 하고요. 하지가 가까워 오면 뿔을 자르지요. 전에는 뿔을 자르는 일이 없었어요. 한국인  녹용업자 들이 사슴을 방목하는 에스키모들에게 상품으로 팔아먹는 방법을 개발시켜 준거지요. 알라스카 주정부의 허가를 받아서 말예요. 그것이 이제는 생업의 일부가 되었어요.”
“사슴을 잡는 일은 없나?”
“사슴도 많이 잡아서 육류로도 팔지요,”
  앤지와 죠오지를 따라 통나무 캐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는 원시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북쪽 벽에 설치되어 있는 화덕 위에는 사슴머리가 박제로 걸려있고 서쪽 벽에는 백곰의 머리형태가 그대로 박제된 표피가죽이 벽면 전체를 장식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순백색의 커다란 백곰이 표피 박제를 보고 신기하고 놀라운 생각마저 들었다. 나중에 나는 폴의 설명을 듣고 그것이 북극에만 서식하는 폴라베어라고 하는 북극백곰 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모피장식이 있는가 하면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창과 칼 그리고 총신이 크고 작은 사냥용 장총이 여러자루가 진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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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치 총포상에 들어선 느낌을 받았다.
“피제이가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 많은가 봐.”
폴은 이것저것 두루 살피는 내가 오히려 신기한 모양이었다.
“원하시는게 있으시면 다 드리겠습니다.”
죠오지는 내가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만족스럽다는 듯 말을 받았다.
“죠오지, 피제이가 갖고 싶은 것이 많으면 어떻게 하려고 원하는 대로
다 주겠다는 건가?”
“염려마쇼,여기서 내가 가지고 있는것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겁니다. 마누라만 빼고 말입니다.”
  죠오지의 꾸밈없이 순진한 농담을 가볍게 웃어 넘겼지만 실은 범상
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스키모들은 귀한 손님이 오면 자기 부인까지도 손님과 잠자리를 같이 하도록 빌려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 않은가. 그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이라고 했다. 문명인들의 관습으로 본다면 그들의 성적 인간관계는 문란했음이 틀림없다.
근친상간에다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부인이나 딸을 빌려준다면 그것은 관습적인 것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나는 토기엑으로 오기 전에 폴이 내게 농담삼아 한 말을 기억하며 막연히 현실적인 공상을 해보았다.
“피제이 요즈음 개화된 에스키모들에게는 손님에게 자기 부인이나 딸을 빌려주는 관습이 통할 리가 없지만 옛날에는 평범한 일이었음에 틀림 없었다구. 사실 나 자신도 그러한 경우를 몇년전에 경험을 했으니까.
누누백이라는 섬에서 두어번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니까. 아직도 그곳에 있는 사슴목장에서 일하고 있는 칸이라는 녀석과 가끔 거래를 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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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곳에 찾아갈때 그녀석이 좋아하는 술을 사다주곤 하면 그날 밤은 자기 여동생과 잠자리를 하라고 하더란 말이야. 처음에는 농담으로 들었는데 진짜로 곤욕을 치루었다니까. 한번은 자기 여동생을 내 잠자리에 들여보냈더라구.당황한 나머지 잠자리를 도망쳐 나왔지만 그 후에도
그 녀석은 예사로 그런 소릴 하더라구.”
  그날 오후 죠오지는 여동생이라는 여인을 내게 소개했고 나는 그녀와
언어소통이 원만치 않아 그저 몇마디 영어로 인사말을 주고 받았을뿐
 그녀 역시 죠오지와 비슷한 황갈색 피부에 긴 생머리를 땋아내렸다.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해서인지 그녀역시 나를 보고 그저 가만히 웃는
것이었다.
  나와 폴 부부가 울타리도 없는 뒷뜰에 나가 전원풍경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이미 대낮부터 술에 취한 죠오지의 이웃 에스키모 친구들이 서너 명이나 찾아왔고 죠오지는 앤지가 이르는대로 그날 저녁 파티 준비를 하느라 집안을 들락날락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폴에게 목장 주변을 산책해보고 싶다는 핑게를 대고 밖으로 나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는 나의 기분을 알아주는 듯 그러자고 순순히 응했다.

  나는 폴과 함께 목장의 거친 풀밭을 거닐면서 여기저기에 한가롭게 무리지어 있는 사슴들을 바라보다 가는 멀리 산림숲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는 서구풍의 멋진 유니폼을 입고 고적대를 지휘하던 앤지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나의 시야에는 사슴 무리들이 수많은 인파로 보였고 그가운데서 당당하게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선연하게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북극의 산림으로 둘러쳐진 이 쓸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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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서 도시화된 자신을  내던지고 정녕 유배의 길을 왔다는 말인가.   나는 그녀가 죠오지로 하여금 나를 이곳으로 초대하게끔 내버려둔 그 심사도 그렇고 선선히 초대에 응한 나 자신의 처신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과연 내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것일까. 낮게 드리워진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피제이, 무슨 생각을 그리 곰곰히 하는가?”
“폴,도무지 내가 이자리에 왜 서있는지 모르겠어. 아까부터 내 자신에게 수없이 물었지만,… 난, 모르겠네. 우연이라고 하기엔 앤지와 나의 갈등이
너무 심한것 갖고,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엔 상처가 너무 커.”
“자네와 앤지가 지난 과거에 얼마나 깊은 애정을 나누었는지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어. 자네는 현실을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이는것 같아.현실과 과거를 동일시 하지 말게.”
“폴, 자네의 말이 옳아. 그러나 앤지의 현실이 나와 얽힌 과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지워 버릴 수 없는 문제야. 나는 아까 앤지의 딸 리자를 보면서 그러한 죄책감이 들었네. 그리고 그녀는 한국에서 내 아이를 임신한 적이 있었네.”
“그게 사실인가?”
폴은 담담하게 내얼굴을 들여다 보았디.
“앤지가 내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이미 부모님들의 중매로 약혼을 한 처지였고 그녀는 내게 찾아와서 아이를 낳겠다고 고집을 부렸지.
내가 극구 반대하자 그녀는 가출을 하고 잠적해 버렸지만 나는 그녀를 수소문 끝에 찾아내어 강제로 유산을 시켜버렸어. 내가 막상 결혼생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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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고 나서야 그녀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되더군. 사회적 체면과 가문의 명예는 지금 돌이켜보면 별것도 아니었는데 지금 앤지가 어떻게 사는지 나는 모르네. 그녀의 행복이나 불행을 떠나 이렇게 춥고 낯선 땅까지 쫓겨와야만 하는 이유가 아마도 나로 말미암지 않았을까 생각돼.”
“글쎄, 감정이나 사랑이란 것이 논리 이전의 문제니까. 피제이의 그 기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아. 그러나 두사람이 그런식으로 나간다고해서 서로 함께 나누었던 애정의 상처가 원래의 모습으로 환원이 되는것은 아닐세. 지금이라도 기회는 있을 것 같아. 어떤식으로든 말이야.”
“아니야 아니야 모든것이 너무 많이 변했어. 이런것은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니였어. 폴, 나는 모르겠네.”
폴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해하지 말게.나는 자네의 진실이 왜곡되 않기를 바라네.”
“왜곡이 아니라 아직도 앤지에게는 그 과거가 고스란히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걸세. 그녀는 내아이를 유산한후 윤락가와 유흥가를 전전했는가 하면 미국으로 왔지만 그나마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이 북극의 오지에서  자신을 유배시키고 있는 걸세.”
 
“피제이, 자네는 너무나 비극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있는것 같아. 삶 자체가 완전하지 못한데 남녀의 애정이 어찌 완벽 할 수 있겠나. 이 세상에 기쁨만 넘친다면 그 기쁨에 파묻혀 못살 것이고 오로지 불행만 존재한다면 슬픔에 견디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걸세. 자네 어차피 베델로 가서 조용히 한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 아닌가. 지금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으리라 믿네.”
  폴과 나는 기분을 정리하며 걷기만 했다. 폴 역시 나의 심증을 헤아린다는 것이 꽤나 착잡한 일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 폴을 부르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죠오지가 집 앞에 나와서 손짓을 하며 두명의 사내와 다가오고 있었다.
“피제이, 죠오지가 사냥을 하러가자는 것 같애.”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내게 일러 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장총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어디로 사냥을 간다는 거지 ?”
의아스럽게 폴을 쳐다보았다.
“가긴 어디로가. 여기있는 사슴이나 잡아서 우리에게 저녁식사 대접하려는 거겠지.”
  폴과 나는 발걸음을 돌려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폴,우리 사슴이나 한마리 잡읍시다. 이왕에 앤지의 선생님이 오셨
으니 손수 사냥을 하도록 해 드려야지요. 자 이 두분에게 총을 드리라구.”
  죠오지는 따라온 두 사내들에게 말했다. 폴과 나는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총을 건네 받았다.
“어디 여기서 사냥한다는 건가?”
  폴이 묻자 죠오지는 완만한 능선이 서에서 남북으로 뻗은 숲을 가리켰다.
“사슴들이 몰려 있는데 총질을 하면 사슴들이 날뛰고 난리가 난다구요. 적당한 숫놈 한 마리 골라서 저쪽 숲으로 몰고 추격할테니까 두 분은 먼저 숲속 입구로 가세요.”
“그거 재미 있겠군. 피제이 자네가 사냥을 해야 되네.”
“나보고 총을 쏘라고?”
“그러믄요. 박 선생님을 위해서 사슴을 잡는거니까요. 어서 가서
준비하고 기다리세요.”
  죠오지는 총을 들고 두 사내들과 함께 목장의 맨 북쪽 끝에 사슴들이 무리지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나는 폴을 따라 죠오지의 집 뒷편 풀밭을 지나 숲으로 향했다. 폴과 나는 죠오지와 두 사내들의 행동을 뒤돌아보며 사슴이 달아나는 방향을 보고 추격할 태세였다. 잠 시 후 한발의 총성이 울리며 무리를 지어있던 이십여 마리 정도의 사슴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순간 사내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에서 세 마리는 폴과 내가 있는 방향으로 줄달음질쳤고 그 뒤를 죠오지와 두 사내가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 중 세마리 사슴 가운데 두마리는 이미 북쪽방향으로 흩어졌고, 커다란 숫놈 한마리가 지목이 되어 계속 추격을 당하여 폴과 내가 서있는
방향으로 달려 왔다.
“ 바로 그놈입니다.”
  죠오지가 소리쳤다. 그러나 사슴은 순식간에 폴과 나를 비켜서 숲 속으로 도망쳤고 그 뒤를 따라 모두들 합세해서 추격했다. 나는 총을 들고 몇 십미터가지는 사슴을 보고 뛰어갔으나 빠르게 이동하는 물체를 바로 조준할 수가 없었다. 그런에 잠시후 죠오지는 내앞에서 멈추면서 자기 앞으로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그제서야 나는 사슴이 우뚝서며 뒤돌아보는 모습을 보았고 그 사슴의 커다란 눈망울이 시야에 선연하게 들어왔다. 그 사슴 앞에는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벼랑이었다. 사슴의 눈망울을 의식하는 순간 그 사슴이 도망칠 수 있는 퇴로가 있는가를 살피려고 했으나 죠오지가 ‘쏘라니까요!”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은 단발이었고 죠오지가 잽싸게 사슴을 향해 발사했다. 사슴은 바로 몇 걸음도 못가서 그대로 쓰러졌다. 그가 단 한 발로 목표를 명중시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죠오지는 두 사내들과 죽은 사슴의 몸통과 네 다리를 동아줄로 묶은 다음 막대를 가로질러 놓고 두 사내가 양쪽에서 어깨에 걸쳐매었다. 총탄을 맞은 사슴의  관자놀이에는 붉은 선지피가 홍건히 배어나오고 두 눈은 총탄을 맞기 직전에 우뚝서서 뒤돌아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뒷뜰에 돌을 쌓아 만들어 놓은 화덕에는 마른 장작더미가 불똥을 튀기며 타오르고 죠오지는 각을 떠낸 사슴고기에 바베큐 쏘스를 듬뿍 발라 쇠고챙이에  꿰매어 화덕을 중심으로 양쪽에 x자로 만들어 놓은 통나무 받침대에 올려 놓았다.
“피제이,이런 사슴고기 바베큐 먹어본 적이 없을거야.”
폴은 사뭇 분위기를 즐기는 표정이었다.
“영화에서나 보았지. 난생 처음이네. “
“고기가 연하고 맛이 일품일세. 역시 자연 그대로 원시적인 조리법이 풍미가 있는것 같아.”
“당연하지. 도시에서는 고작해야 사슴고기로 쏘세지를 만들어 비싼 값에 팔지만 우리는 이렇게 진짜 고기맛을 즐긴다 이말씀이야. 폴, 고기 굽는 일좀 도와줘. 다른 준비는 앤지가 하더라도 술만은 내가 챙겨야 하니까. 어제 앵커리지에 다녀오면서 특별히 술을 몇병 사가지고 온게 있다구.”
                                                                                                         83
“알았네. 오늘 고기굽는 일은 내가 맡을 테니까 염려말게. 나도 이제는 이런 야만적인 풍습에는 제법 익숙해졌다니까.”
“맞아, 폴도 알라스카의 에스키모 생활에 대해 이제는 아는바가 많으실테니까.”
죠오지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 피제이, 아까 사슴 사냥할때 일부러 헛방을 쏜것 같은데 왜 그랬어?
군대생활을 몇년 씩이나 한 사람이라 그정도의 표적은 충분히 명중시킬수 있었을 텐데.”
  폴은 타오르는 불길에 시선을  둔 채로 빙긋 웃었다.
“ 글쎄…그때 상황이 그랬어. 벼랑 끝에 서서 슬픈 눈을 하고 사슴이 뒤돌아 보더라고. 그런데 그앞에서 어떻게 제대로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기겠나.”
“그렇지만 자네 손으로 잡지않아도 그 사슴은 이렇게 요리되고 있지않은가.”
  폴은 쇠꼬챙이에 매달린 고기를 가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사냥을 하는것은 에스키모인 생업의 일부야. 아니 그보다도 육식을 해야하는 인간들에게는 살생한다는 그 자체가 생활의 일부가 아닌가. 물론 아까처럼 사슴을 죽인다는 것이 자네 눈에는 야만적인 행위로 보여졌을지는 몰라도 그들에게는 그런대로 그것이 원시적인 낭만이기도해. 그리고 생업의 일부로서 살생을 하기 때문에 죄의식같은 감정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물론 자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야. 그런데 인간은 살생에 대해 원래 죄의식을 가지고 있잖아. 동물애호가들도 분명히 육식을 한다구.
                                                                                                     84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살생을 싫어하면서도 푸주간에서 나오는 고기로 영양을 섭취하고 미각을 즐기는것도 사실이야. 그렇게 보면 인간은 그 자체가 모순적인 존재지.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일치될 수 없느니까.”
“피제이,생각이 너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군. 그러나 그 모순적인 논리 때문에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계속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적 있어?”
“ 자네야말로 내 생각보다 훨씬 비약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군. 듣고보니 자네의 말이 상당히 합리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천만에 꼭 그런것도 아니네만 역조적인 현상도 있다네. 예를 들면 순순한 에스키모 종족의 숫자가 줄어 들고 있다는 사실일세. 왜 그렇다고 생각되나?’
“ 생존을 대부분 자연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인가.” “ 자네도 내 생각과 거의 통하는 점이 있군. 즉 그들은 문명의 이기에 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자연의 생활습관을 고집스럽게 지키다가 자연도태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얘기지. 아직도 일부 에스키모들은 유목민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구.”
“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인가?’
“ 그런 셈이지.”
“그러나 그들도 미국 정치문화 영향권에서 문명의 이기를 향유할 수도 있지 않은가?”
“ 물론이지. 그들에게 학교와 교회를 지어주어도 한곳에 제대로 정착하지 않기 때문에 학교와 교회는 빈 건물로 남기가 일쑤야. 원주민 보호라는 차원에서 사회복지 혜택을 특별히 마련해 주고 있지만 오히려 술과 마약등의 소비성과 해독을 조장하고 자연히 나태하게 만들어버린 결과를 초래했지. 그 중에는 죠오지의 경우처럼 개화라고나 할까 또는 문명의 이기에 편승했다고나 할까? 도시에서 교욱을 받고 생활수준도 상당히 확보한 에스키모들도 꽤 있어. 그들 종족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야. 그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도시문명의 생활인과는 달리 풍토성 질환도 많다고. 예를 들면  식물성 영양섭취 부족으로 시력이 빨리 저하되고
치아까지도 빨리 부식하는가 하면 기후와 알콜 중독으로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까지도 있어.”
  폴은 나의 기분을 전환시켜보자는 뜻에서인지는 몰라도 생각밖으로 알라스카에 대한 인류학적인 상식을 많이 들려주었다. 폴과 이야기를 계속 나누고 있는 사이에 벌써 술자리가 마련되고 모두들 화덕 주변에 둘려앉아 사슴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나역시 사슴을 잡을 때의 혐오감에서 벗어나 아이러니하게 연한 고기맛을 즐겼다. 장작불에 그을리면서 구운 고기 살점을 잘라내어 먹는 맛은 생각보다는 별미이기도 했다.
  술을곁들인 사슴 바베큐 파티는 오후 내내 계속 되었고 서쪽 하늘에는 노을이 온통 붉게 물들고, 땅거미 질때는 이미 모두들 취기가 깊었다.
  처음 술잔을 주고 받기 시작했을 때는 대화도 정연하고 분위기가 소탈했으나 취기가 오르자 죠오지와 그의 이웃 친구들은 절제없이 음주를 하고 차츰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습관화된 주벽 같기도 했다. 마침내 취기가 깊어지자 대화의 내용도 산만해지고 횡설수설에 가까운 잡담이 되고 말았다. 술에 취했을망정 죠오지는 앤지의 충고에 이의없이 따라 주었고 두 사내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폴 역시 그들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취하자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듯 스지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화덕의 모닥불 옆에는 나와 앤지만이 나란히 통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불을 쪼이며 한동안 허허해진 기분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사실 침묵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대화의 실마리를 기억해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 재만씨, 춥지 않으세요?”
  그녀는 꼬챙이로 모닥불을 다독거렸다. 나는 말없이 머리를 저어 보였다.
땅거미가 지는 어둠 속에서 노을과 모닥불에서 반사되는 불빛은 그리움의 잔재처럼 그녀의 얼굴에 머물고 있었다.
“ 한국 사람들의 속담에 이런말이 있지요. 모닥불에 거지가 살이 찐다고 하는말.”
“ 왜 그말을 기억해 냈지?”
“ 기억해 낸것이 아니라 기억에 떠오른 거지요. 이해할 것 같아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거지가 배고픔을 면하고 나서 모닥불에 추위를 잊는
다면 그 순간처럼 행복한 것은 없겠지요.아마도….”
  그녀는 장작개비를 서너 개나 모닥불에 올려 놓았다.
“ 저는 당신의 아이를 유산시키고 가출한후 칠 년이라는 세월동안 저 노을처럼 애증을 불태우며 살아왔어요. 결국 짙은 어둠에 묻혀 버리고 말게 될 저 노을처럼 말이예요. 이제 그 노을마저 사라져가는 황량한 나의 마음속에 누가 모닥불을 피워줄까요? 당신 알고 있나요? 말씀해 보세요. 이제와서 무엇을 다시 어떻게 하자는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해요. 제가 아직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을 만남으로써 깨달 았어요.”
“ 지금  무슨말을 한들 연지에게 위로가 되지도 않겠지. 단지 내가 할수 있는 말은 연지를 이곳에서 다시 만난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 뿐이야. 과거 나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하는 뜻도 아니야. 연지가 불행하다면 그 불행은 연지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해.”
  나는 그제서야 술에 취해서라도 모든걸 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연거푸 술잔을 비우자 이번에는 그녀가 만류하고 나섰다.
“ 나도 술은 얼마든지 마실 수 있어요. 알라스카에 와서 오늘 저녁 처음으로 술을 삼가했어요. 재만씨와 오늘밤만은 꼭 제정신으로 마주하겠다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에요. 죠오지가 당신을 초대하자고 제안했을 때 제가 반대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아세요?”
  나는 술병을 통나무에 올려놓고 그녀의 정색한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알라스카에서 그녀를 다시 만난 이래 처음으로 그녀의 모습이 과거의 모습으로 환원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녀의 의중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을것 같으면서도 대답할 수 있는말을 찾지 못했디.
“ 당신에게 나의 현실을 모조리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나를 외면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의 모든 과거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당신이 과거에 정리하지  못했던 애정의 편력이 한 여인의 삶을 통해 세상의 한 구석에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싶었어요. 제 생각이 너무 잔인한가요?”
“ 바람이 너무 차갑군.”
  어떤 말로든지 그녀를 위로해야 했지만 단 한마디의 말도 생각해낼수 가 없었다. 땅 끝에서 바람은 그렇게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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