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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회귀선

Views 571 Votes 0 2015.12.04 18: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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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회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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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월 하순에 접어들자 북극의 태양도 비껴가듯 멀리 남쪽하늘을 돌아 낮게 떠오르고, 광활하게 뻗어나간 산림평야의 끝자락에 눈쌓인 하얀 산봉우리가 아스라이 시야에 잡히면 짐짓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 가슴을 스쳐가는 외로움이 밀려오곤 했다.

   팔월 하순부터 북극점을 출발한 단풍은 눈바람에 쫒기면서 북회귀선을 중심으로 끝없이 펼쳐진 이곳 델타평야를 거쳐 이미 북위 사십도 선을 넘어 어디에서인가 낙엽과 함께 겨울잠을 자고나면, 꽃바람을 몰고 오는 대지의 시샘에 밀려 다시 북극으로 돌아온다. 그 무렵이면 얼어붙었던 북극의 대지에도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피어나고, 남풍의 시샘을 따라 캐리브사슴들은 무리를 지어 북극의 대지를 향해 긴 여로에 나선다. 이때부터 북극의 대지는 기지개를 펴고 백야의 여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백야의 여름은 금시 오는 듯 떠나 버리고 북극의 대지는 다시 깊고 깊은 겨울밤을 맞이하게 된다.


   나는 빌 리가 픽업트럭을 몰고 당도하기 전에 미리 밖으로 나가 아예 하이웨이 입구에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현관 쪽으로 나왔다. 주인인 데이빗 영감은 빌리와 톰이 무스사냥을 하기 위해 준비해온 장비를 보면 난색을 표할 것임에는 뻔한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빌리와 톰은 지난여름부터 나를 위해 무스 사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날을 잡은 것이다.

부츠를 막 신으려고 하는데 거실 문이 열리며 데이빗 영감부인의 얼굴이 보였다.

“피제이, 앵커리지에서 전화예요. 당신 친구 폴이예요.”

거의 이주 동안이나 폴과는 안부전화도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에 반갑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엔지에 대한 근황 때문에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앞섰다. 나는 거실로 들어가서 탁자 위의 수화기를 덜었다. 폴은 전화를 받자마자 주말인 오늘 일정이 어떠냐고 물었지만 그 자리에서 무스사냥을 간다는 예기는 할 수 없었다.

“피제이, 자네 내일이라도 곧 앵커리지로 와야겠어.”

나는 “폴”이 다음 말을 계속하기도 전에 델타를 떠나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을 했다.

“..........................”

“엔지가 요양원에서 퇴원하게 되었다는군.”

“죠오지는 뭘 하고?”

나는 어떤 기대와 절망감에 빠져들면서 당연히 그녀는 나를 찾아야하고 그녀가 나를 찾지 않는다할지라도 나는 그녀에게로 가야한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죠오지 한테서 전화가 왔어. 오히려 자네가 스월드 요양원에 가서 자기 대신 보호자서명을 하고 퇴원수속을 마친 후 자기네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거야. 죠오지 말로는 앤지가 죠오지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는 걸세. 자네가 오면 이곳에서 요양원까지 차편은 내가 준비하고 당일 내 쎄스나기로 앤지를 토기엑의 목장까지 데려다 주겠네.”

나는 문득 그녀의 회복에 생각이 미치기 보다는 왜 하필 퇴원 후도 아니고 퇴원하기도 전에 더군다나 남편 죠오지를 시켜 연락을 취했는가에 대해 의문과 당혹스러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겠나?”

“물론 가야지.”

“짐을 아주 챙겨가지고 올 텐가, 아니면 왔다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텐가?”

“일단 짐을 챙겨가지고 떠나겠어.”

나도 모르게 쉽게 짐을 챙기겠다는 말이 나왔다. 사실 그것은 앤지 때문에 늘 준비하고 있던 잠재의식일 뿐이었다.

“잘 생각했어. 자네가 그곳에서 또 겨울을 지낸다는 것은 무리야. 이미 지난해 경험을 했잖아.”

“알았네. 차편이나 비행기 편이 마련되는 대로 내일 당장 떠나겠어. 다시 연락하겠네. 고마워.”

전화를 끊고도 황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이웨이 쪽으로 나가 빌 리가 트럭을 몰고 나타날 길목까지 걸어 나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앤지가 정신요양원에서 퇴원하면 나는 그녀를 데리고 알라스카를 떠나겠다고 폴에게 공언했고 그녀에게도 그렇게 말했지만 어디로 떠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막연한 처지였다. 아름다운 캘리포니아 해변을 연상해 보다가는 문득 인적이 없는 그린랜드로 도피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러나 일단 <델타>를 떠난다는 생각은 접어두고 하이웨이를 건너 우체국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습관처럼 앵커리지로 통하는 남쪽으로 곧게 뻗은 <리차드슨 하이웨이>를 따라 시선을 주고 나서 다시 캐나다로 통하는 동쪽 편 도로를 바라보본 다음 삼거리에 우뚝 솟은 이정표에 시선을 멈추었다.

 차가운 대지의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있는 철재 이정표와 다름없이 산림평야의 한가운데 갇혀 있다는 외로움을 느끼는 것도 이제는 마지막이었다. 어쨌든 떠나야 한다는 자체가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며 동시에 과거에 대한 이별이 따르는 서글픔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정표와는 반대 방향인 북쪽 도로변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우체국과 마켓앞을 지나 이백 미터쯤 올라가면 “빌리”가 살고 있는 통나무 케빈으로 통하는 시원스러운 산림도로가 동쪽으로 뻗어있고, 그는 픽업트럭을 몰고 “톰”과 함께 분명히 그 쪽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우체국 앞을 막 지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자동차의 급브레이크 소리가 나며 경적이 울렸다. 

“피제이 안녕하세요? 어딜 가시는 거예요?”

웨곤지프에서 내린 사람은 “빌리”가 아닌 “자넷트”였다.

“안녕하세요? 자넷트는 어쩐 일이세요?”

“사서함에 우편물 찾으러 왔어요. 혼자서 어딜 가시는데 걷고 있어요? 내가 태워다 드릴게요.”

“아니요, 빌리가 차를 가지고 올 겁니다. 오늘 무스사냥 가기로 했어요.”

“그래요. 그런데 제게는 미리 얘기도 안하고. 그리고 어제 저녁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마지막 강의시간이라 빠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어요. 전화를 드렸지만 집에도 안계셨고... 무척 섭섭했어요.”

그녀는 알라스카주립대 델타분교에서 영어강사를 맡고 있는데 나는 일주일에 하루 저녁 두시간 강의인 ‘오럴 커뮤니케이션 클래스’를 수강해왔다. 그녀가 담당하고 있는 클래스에 등록을 해놓고도 여러 차례 강의에 출석하지 않았다. 어제 저녁에는 빌리와 주막의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당구를 치다가 그만 시간이 늦어 강의 참석을 포기해버렸다.

그녀가 오늘 저녁 스케쥴 어떠냐고 묻자 나는 사냥 후에 빌리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일러 주었고 그녀는 식사 후에라도 좋으니 주막의 피자집에서 만나 와인이나 한잔 하자고 했다.

내일이면 떠난다는 생각에 쾌히 승낙은 했지만 왠지 떠난다는 말을 선뜻 꺼낼 수가 없었다. 델타에 머무는 동안 그녀와 함께 보낸 순간들을 돌이켜 보면 그녀 역시 잊지 못할 그리운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기억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요 자넷. 오늘 저녁에 한잔 합시다. 저도 자넷에게 하고 싶은 얘기도 많아요.

“정말이예요?” 꼭 듣고 싶네요.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사냥 잘 다녀오세요. 연락드릴게요.“

그녀는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우체국으로 들어갔다.

이곳 주민들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두 가지로 분류해서 지칭한다. 이 고장에서 살기 위해서 정착한 사람들을 ‘델타나’라고 하고, 필요에 따라 사업상 또는 직업상의 이유로 머물다가 떠나게 될 사람들은 ‘델타토이“라고 부른다. 주민과 나그네를 이렇게 구분해서 부르는 것이다. 

델타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유칸브리티시>의 캐나다 국경과 북으로는 <페어뱅크>를 거친 북회귀선에 이르기까지 사방 이백마일에 이르는 산림평야를 자동차로 여행해 보면 그 대평원의 장관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언제인가 한국정부에서 파견된 식량문제 전문가가 남미를 거쳐 북상하다가 마지막 이곳 델타평야에서 한눈에 반해 감탄했다는 얘기를 폴이 전해 준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태어난 주민들 중에는 해외는 물론이고 심지어 미국 본토 여행도 못해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오히려 캐나다와 유럽은 여행을 하면서도 정작 본토여행은 지리상 더 어려운 여건에 처해있는 형편이다. 어떤 때는 주막의 바에서 나로부터 로스앤젤리스나 샌 프란시스코 또는 라스베가스 등에 관한 도시의 이야기를 듣고 꽤나 황홀해하고 부러워하는 델타나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곳 주민들처럼 델타나가 될 수는 없어도 이곳에 와서 일년 이상을 체류하는 동안 친구가 될 만큼 정든 사람들을 사귀게 되었다. 동양인들의 모습을 보기 어려운 이곳에서 나는 우체국과 마켓 그리고 주막이나 미장원에 드나들 때 마다 모두들 많은 호기심을 보이며 여러 가지 질문을 해왔다.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는 사람들은 으레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때로는 심지어 필리핀이냐 하고 물으면 첫마디에 코리언이냐고 묻지 않는 것이 섭섭하기도 하고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야를 잠식해버린 지평선이 드리운 이 넓은 평야에 살면서도 주민이 적다보니 그들은 마치 한국의 시골처럼 누구네 집에 죽이 끓고 밥이 끓는지 손바닥 보듯이 마을사정에 훤했다. 마실을 가도 주택들이 보통 일마일 이마일 씩이나 떨어져 있으니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으면 거의 왕래가 어려운 형편이다.

모두들 나를 피제이(P.J.)라고 불렀다. 한국식 이름을 발음 그대로 부르기가 불편하여 폴과 빌리가 박재만이라는 내 이름의 첫 자만을 따내어 피제이라고 한 것이 닉네임으로 통하게 된 것이다.

나는 빌리가 나타날 길목에 서서 산림 사이로 시원스럽게 쭉 뻗어나간 도로를 바라보며 시계의 끝에 하얀 산자락이 아스라이 잡혀오자 체념 같은 생각이 솟구쳐 올라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음력으로는 윤달이 들어있는 해라 불과 삼 주 전에 추석명절이 지났음을 알고 고향이라는 잠재의식이 기억의 덜미를 또 잡아당기고 있었다. 어느덧 이곳에는 백야의 짧은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듯 하더니 벌써 한 달 전부터 눈이 내리고 단풍은 멀리 남행길을 가버린 것이다.

잠시 후 인적도 없고 차량통행도 없는 도로에 한 대의 차량이 나타났다. 나는 천천히 도로변을 따라 자동차가 질주해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자동차의 모습이 시야에 점점 확대되어 오자 나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빌리는 나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브레이크를 밟으며 내 앞을 몇 미터 지나친 다음 U턴을 했다.

옆자리에 타고 있던 톰이 문을 열어주며 뒷자리로 옮겨 앉았고 대신 내가 그 자리에 올랐다. 빌리는 기어을 변속하고는 달려왔던 방향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피제이, 왜 집에서 기다리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 나왔어?“

“그냥 걷고 싶어서.”

“뻔하지 뭔가. 그 놈에 데이빗 영감이 사냥가는 걸 알면 눈치를 줄테니까. 그 놈에 영감 자기만 동물애호가인 줄 아나봐. 지는 베이컨도 안 먹고 스테이크도 안 먹느냐 이거야..”

톰은 뒷자리에서 머그 컵에 담아 온 커피를 마시며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피제이 자네 커피 여기 가져왔어.”

“그래 쿠키도 있으니 우선 간단하게 요기나 하게. 점심 샌드위치는 넉넉히 가져왔어.”

톰은 보온병에 담아 온 커피를 종이컵에 따라 내게 건네주었다.

“톰 데이빗 영감을 무조건 못마땅하게 여기지 말게. 자네야 댈타에서 제일가는 무법자 아닌가.”

언제나 하듯이 빌리는 톰에게 농담을 던졌다.

“무법자니 해도 나는 몇 대를 살아온 델타의 토박이가 아닌가. 다시 말해서 순수한 “델타나”다 이거야. 데이빗 영감이 아무리 난척해 봤자 굴러들어온 돌에 불과하다 이 말씀이야. 그 영감 교회 장로니 뭐니 해도 내가 잡아 온 사슴고기 어디 한두번 얻어먹었나.”

“이 사람아 모든 사람들이 백정이 잡아놓은 고기 먹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닌가. 나는 흥분하는 자네가 더 우습구만.”

“그 뿐만 아니라고. 그 영감 내가 밀렵해서 잡아 온 고기도 여러 번 얻어먹었다 이거지. 그러니 잡은 놈이나 얻어먹은 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거야.”

톰은 쿠키를 맛있게 우적우적 씹었다. 나는 그의 턱수염을 볼 때 마다 영화에 나오는 산적의 모습과 비교하곤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인디언 에스키모 후예로서 델타에서 태어나 미국본토 여행도 한번 못해 본 채로 삼십이 넘도록 이곳에서 살아왔다. 험상궂은 용모였지만 마음은 한없이 유순하고 델타평야 만큼이나 넓었다. 황갈색 피부는 동양인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에게 어떤 거리감도 느끼지 않았다.

“빌리”는 “브라우닝”이라는 성이 말해주듯이 순수한 앵글로색슨계 혈통이지만, 미 육군에서 이십년이나 근무를 하며 월남 및 한국에 파병근무를 한 적이 있었고 나중에는 순이라는 한국여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둘이나 두었다. 물론 폴이 그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한국에 대한 그의 특별한 인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에도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나보다 서너살이나 위이지만 인간관계에서 느끼게 되는 그러한 나이 차이를 전혀 느끼게 하지 않았다.

“톰, 이번에는 어디까지 안내할거야?”

나는 뒤돌아보며 그와 대화할 때의 버릇처럼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한 시간쯤 가야 돼. 밀렵이니까 산림경찰이 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해.”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무스 바베큐를 하는 것으로 알고 순이가 미리 준비하고 있는데 톰 생각은 어때? 잘못된 계획은 아니겠지.”

빌리는 톰을 힐끔 돌아 보고나서 내게 한쪽 눈을 찔끔해 보였다.

“못 잡으면 지난번에 잡아다가 우리 집 냉동에 보관해 둔 것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이번에는 피제이가 꼭 잡도록 해줘야 하니까 말일세. 순이가 기대가 크다구. 오늘은 피제이가 총질해서 잡은 무스고기로 저녁에 바비큐를 하겠다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내가 사냥 길잡이 할 때 한번도 실수한 적이 없잖아.”

“그래서 작년에 캐리브 사냥할 때 피제이와 앤지를 십년감수하게 만들었나.”

“그때야 내 평생 처음으로,,,,.. 피제이 이럴 줄 알았으면 앤지를 부를 걸 그랬잖아.”

톰은 계면쩍게 피식 웃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것은 톰이 나에게 미안하다는 그의 뜻을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빌리 역시 어줍지 않은 표정으로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분명 그는 내가 톰의 돌발적인 말이 내게 어떤 자극을 주지나 않았을까 하는 가벼운 염려일 수도 있었다. 나는 잠시 콧마루를 타고 내려가는 짧은 전률울 느끼며 차창으로 밀려가는 산림평야를 향해 멀리 시선을 던졌다. 그 순간 눈시울이 어른거렸다. 

자넷트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내일 아침 델타를 떠나게 되었다는 말을 선듯 꺼낼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빌리와 순이는 정신요양원에 입원해 있는 앤지의 사정과 그에 따른 나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톰으로서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거의 삼십분쯤 달리고 난 후 톰의 안내로 빌리는 북쪽 방향의 비포장도로에 들어섰다. 숲 속으로 뚫린 좁은 길로 들어서자 햇볕이 가려진 산림은 더욱 음산했고 가슴 속까지 밀려드는 듯한 무거운 고요와 적막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을 뿐 바람도 침묵 속에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

나는 문뜩 일본의 어느 작가가 쓴 ‘사냥꾼 이야기’라는 시리즈로 된 기행소설을 열심히 탐독했던 과거의 시간들을 기억했다. 일정한 주거지도 없이 사냥총과 칼만을 휴대하고 낭인처럼 눈 쌓인 만주의 산림지대나 또는 아프리카 밀림지대를 누비며 야생동물과 똑같은 원시적 환경을 이겨나가는 사냥꾼의 이야기를 몇 날 밤을 지새우며 읽었다. 무엇보다도 맹수들과 맞설 때마다 지모와 담력으로 극복해내는 사냥꾼의 걸출한 용기는 거짓말 같으면서도 동경심을 자아냈다. 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하여 뒷자리에서 껌을 질겅거리며 씹고 있는 톰에게 말을 걸었다. 

“톰 자네 사냥하러 가서 맹수들을 만나본 적이 있어?”

“있지. 내가 늑대를 어디 한두 마리 잡았나.”

“호랑이는?”

“델타에는 호랑이가 없다구.”

“그럼 호랑이가 나타나면 총 쏘지 않고 때려잡을 수 있어?”

“저 겁쟁이가 무슨 배짱으로… 총도 없이 .... 아니 총이 있어도 내던지고 줄 행낭 칠걸.”

빌리는 톰을 행해 웃음을 흘렸다.

“그런 소리 하지마. 내손에 잡힌 늑대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 자네도 잘 알면서 왜 그래.”

“그야 자네가 총으로 잡은 거지 결투해서 잡은 건 아니잖아”

“그러는 자네는 늑대와 결투할 수 있겠나? 일대일이면 자신 있는데 이놈의 늑대들은 꼭 몇 마리씩 몰려다닌단 말이야. 어쨌거나 나는 델타의 숲 속에서는 타잔이야. 빌리 자네는 미 육군 유격대의 일등사수지만 나는 델타밀림의 왕자이다 이 말씀이야.

“톰이 왕자이다? 그러면 나는 황태자가 되나.”

“누구 맘대로. 좋아. 그러면 오늘 집에 돌아가지 말고 숲 속에서 야영을 하자구. 내가 늑대 나오는 곳으로 안내할 테니 우리 내기를 하잔 말이야. 총 없이 칼과 도끼 한 자루만 가지고 먼저 늑대 잡는 사람이 황태자가 되는 거야. 알았지?” 하고 톰이 이죽거렸다.

“좋아. 그러면 늑대 못 잡는 사람은 숲 속에 떼어놓고 가는 거다.”

“피제이 자네가 심판을 좀 봐. 지금 빌리가 타잔에게 도전을 해오고 있다구. 이거 말이나 되는 거야?”

“그래 그 말도 그럴 듯 하네.”

그의 말에 나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순진하게 소년처럼 입을 비쭉거렸다. 잠시 동안 카우보이 캐딜락이라고 하는 4인승 픽업트럭은 노면이 험한 숲속 길을 달구지처럼 느린 속도로 달렸고 빌리는 어디쯤에서 진을 칠 것인지를 톰에게 물었다. 톰은 차창 밖을 좌우로 살폈다.

“빌리, 일단 트럭은 여기서 돌려 저 숲 속에다 세워두자고. 그리고 저쪽에 보이는 언덕에서 관측을 하고 나서 행군방향을 정해야겠어.”

빌리는 톰의 말대로 길에서 벗어나 숲속에 차를 세웠다.

일행은 차에서 내려 총과 실탄을 나누어 챙겼고 빌리와 톰은 벨트에 칼과 도끼까지 꽂았다.

빌리는 내 장총에 실탄까지 장전해주며 안전핀을 잠근 후 총을 건네주었다.

“피제이 자신 있겠지? 한국에서 군대생활 할 때 익힌 솜씨 발휘하는 거야.”

빌리는 여유 있게 웃어 보였다.

“내가 총을 쏘라고 할 때까지는 절대로 방아쇠를 당기지 말라구. 알았지?”

톰은 내게 각별히 주의를 주며 앞장섰다. 울창한 침엽수 사이를 걷다보니 완만하게 경사진 계곡이 나타났고 햇볕이 드리운 아늑한 평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삼십 미터쯤 앞서가던 톰이 멈춰 서서 목에 걸치고 있던 망원경으로 남서쪽 방향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뭐 보이는 거 없어?”

빌리가 나직이 소리치자 톰은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너무 멀어. 오백 야드가 넘을 것 같아. 두 마리가 나타났어.”

빌리와 나는 톰에게로 뛰어갔다. 

“눈이 제법 많이 쌓였기 때문에 이놈들이 낮에는 양지쪽으로 나올 때가 되었다구.” 

빌리는 톰의 망원경을 받아들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관측을 했다.

“저놈들을 쫒아가서 잡으면 오늘 해가 질 때까지 고기 덩어리 삼분의 일도 운반 못한다구.”

톰은 거의 체념조로 지껄였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여기서 더 기다리자는 건가?”

빌리는 망원경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피제이 한번 보라구. 숫놈과 암놈이 한 쌍이야.”

나는 빌리에게서 망원경을 넘겨받아 남서쪽의 완만한 경사를 이룬 계곡의 양지에서 두 마리의 무스가 서서히 배회하는 모습을 찾아냈다. 실감이 나지 않으리만치 호마보다 더 큰 무스를 보는 순간 야릇한 긴장감과 흥분이 감돌았다.

몸통은 우람하게 크지만 초식동물이라 유순하기 짝이 없는 야생동믈을 살생한다는 것은 데이빗 영감 말대로 살인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지난해 봄 죠오지의 초대를 받아 폴과 함께 토기엑에 있는 그의 사슴목장을 방문했을 때 그가 나를 위해 사슴을 잡던 순간을 기억하며 그럴 때마다 조용히 진저리를 치곤했다. 쫒기든 사슴이 바닷가 벼랑에 서서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뒤돌아보는 순간 죠오지와 폴은 방아쇠를 당기라고 소리쳤으나 고의적으로 실수를 하자 죠오지는 간단하게 총 한방으로 그 사슴을 고꾸라뜨렸다.

“저렇게 큰 놈은 총 몇방 맞고 쓰러질 것 같지 않아.”

“염려말게. 이 장총에서 실탄이 발사되는 순간 압력이 이만 파운드가 넘는다구. 이백 야드 내에서는 아무리 큰 짐승이라도 명중하면 즉사하게 되어있지.”

“그러나 저러나 어떻게 할 거야, 빌리. 저놈들을 추격해서 잡을까 아니면 정찰을 더해 볼까.”

톰이 물었다.

“저기까지 가서 잡을 수도 있지만 추격을 할 경우 피제이가 어렵다구.”

“하긴 그래. 오늘은 피제이가 사냥을 하도록 해줘야하니까. 그러면 좀더 정찰을 해보자구. 다른 놈들이 또 나타날 거야.”

톰은 앞장을 서며 나와 빌리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빌리와 나는 십여 미터쯤 거리를 두고 톰을 뒤따랐다. 잠시 후 톰은 뒤를 돌아보며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고 나서는 혼자서 허리를 굽힌 낮은 자세로 경사가 완만한 작은 언덕으로 재빨리 올라갔다.

“톰이 무스를 찾아냈군.”

빌리는 톰의 태도를 보고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와 파트너가 되어 여러 차례의 사냥 경험에서 얻어낸 교감이기도 했다. 

“피제이 작년에 죠오지의 목장에서처럼 긴장하지 말고 내가 사격하라는 신호를 하면 방아쇠를 당기는 거야. 알겠지?”

빌리는 미리 내게 주의를 주었고 나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톰은 다시 자신의 우측 숲속에 매복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빌리가 앞장섰고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피제이 저기 보라구.”

빌리는 톰이 서있는 앞쪽으로 펼쳐진 숲속의 빈터를 가리켰다.

불과 백여 미터 전방에서 세마리의 무스들이 이 쪽을 향해 서서히 이동해오고 있었다.

“톰, 자네는 그 위치에 있으라구. 우리는 저쪽 반대편에 가서 대기할 테니까.”

 빌리는 양쪽에서 협공을 하자는 것이었다. 톰은 약간 경사진 위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고, 빌리와 나는 평지의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내가 신호를 하면 피제이부터 총을 쏘라구.”

톰이 나직이 일러주었다.

“빌리 세 마리 다 잡을 건가?”

궁금한 표정으로 빌리를 쳐다보았다.

“제일 큰 수놈으로 한 마리만 잡으면 되. 세 마리 다잡아 보았자 처치할 수가 없다구. 한 마리도 전부 운반할 수도 없고 냉동해 두기도 불편해.”

천천히 이동해오는 무스를 살펴보고 있는 순간 초초하고 무료함을 느꼈다. 과연 저 세마리 가운데 한마리가 나의 총에 맞아 쓰러지면 살아남은 두 마리는 숲 속으로 도망칠 것이고, 죽은 놈은 몇 사람의 입을 즐겁게 하는 바비큐용 고기가 되는가 하면 시체의 반 이상은 숲 속에 버려지거나 또는 다른 야생동물의 먹이가 될 것이다. 결국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련된 이번 사냥이 잔인스러운 게임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피제이, 안전핀을 풀지 말고 일단 조준을 해봐.”

일단 나무에 왼쪽 어깨를 기대고 오른쪽 어깨에 총 개머리판을 들어올려 밀착시킨 다음 조준을 했다. 조정경의 열십자가늠선에 무스의 몸통을 맞추다가 다시 무스의 정수리 부분으로 가늠자를 이동시켰다.

“피제이 정확히 조준이 되지?”

“정확히 들어왔어.”

“일단 총을 내리고 잠시 대기해. 지금처럼 정확히 조준된 상태에서 눈을 절대로 감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구. 피제이, 군대생활할 때의 사격 솜씨대로 하면 된다구.”

빌리에게 머리를 끄덕이며 그저 웃어보였다. 톰은 건너편에서 질겅거리며 씹던 껌을 뱉어내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는 손을 들어 보이며 여유 있게 웃었다.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무스들의 이동은 완만했고 여전히 사정거리 밖에 머물고 있자 톰은 무스 쪽으로 접근하자는 신호를 해왔다. 빌리와 나는 톰의 행보에 맞추어 무스들을 향해 접근해가기 시작했다. 무스들이 사정거리에 점점 가까워지고 우람한 몸체가 눈앞에 드러나자 빌리의 말대로 유순한 동물이라 할지라도 나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총 몇 방 맞고 쓰러질 것 같지 않았다. 불과 사 오십여 미터 정도까지 접근해 갔을 때 톰은 정지신호를 보냈고 빌리는 옆으로 이 삼 미터 물러나며 사격자세를 취했다. 

“피제이 나무 뒤에 기대어 조준해.”

나는 긴장하며 왼쪽 어깨를 나무에 기대고 엉덩이를 붙이고 땅바닥에 앉아 물체를 조준했다.

“피제이, 선두에 선 제일 큰 놈의 정수리를 조준하라구. 됐어?”

“응.”

무스의 커다란 눈망울은 더욱 긴장을 쌓이게 했고 사냥에 나선 것이 조금은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피제이 당겨!”

나는 안전핀을 푸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으며 방아쇠를 당겼고 연발의 총탄은 숲속의 무거운 고요를 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하늘의 천둥소리도 벼락소리도 이보다 더 무섭게 뇌리에 전달된 적은 없었다. 나는 대기의 적막이 산산이 조각나는 괴음에 소름이 끼쳤다. 

나의 총탄은 무스의 몸통에 맞았고 내가 총을 어깨에서 내리는 순간 빌리와 톰이 앞다리를 번쩍 치켜들며 뛰어가려는 자세를 취하는 무스를 향해 다시 총탄을 발사했다.

그들의 실탄은 모조리 정수리 부분에 명중 했고 무스는 몇 미터 앞으로 나아가듯 하더니 쓰러지며 옆으로 뒹굴었다. 나머지 두 마리는 벌써 나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빌리와 톰은 서로 마주보고 너털거리며 웃었다.“

“피제이가 총을 쏠 때 눈을 감았나 봐.”

“피제이 기분이 어때?”

빌리는 나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씩 웃어보였다.

“저렇게 큰 짐승이 쓰러지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가 보자구.”

톰이 먼저 달려갔고 나도 빌리를 따라 쓰러진 무스 옆에 다가갔을 때 마치 코끼리가 한 마리 누워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스의 머리와 복부에서 흘러내린 선지피가 눈 위에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 아랫도리가 은근히 떨려왔다. 무스의 심장은 아직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고 복부는 심장의 박동에 따라 꿈틀거렸다.

빌리가 사냥 전에 여러번 애기했듯이 무스는 잡는 것보다는 사냥 후에 운반하는 것이 골치 거리라고 했다. 막상 무스를 잡고 보니 불과 몇 사람의 힘으로 호마 보다 몸집이 더 큰 무스를 숲속에서 운반해 낸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수렵허가 기간에는 견인차를 동원하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밀렵이라서 도리 없이 숲속 현장에서 각을 떠서 살코기만 부대자루에 넣어 운반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톰이 자동차에 가서 준비해온 부대자루와 도끼를 가져왔다.

“여기서 토막을 쳐서 오늘은 몇 부대만 가져가고 내일 몇 사람 데려와서 운반하는 거야. 이거 한 마리면 몇 집은 냉동에 보관하고 올 겨울 내내 먹을 수 있지.”

“피제이 자네 올 겨울 여기서 지내면 무스 스테이크 물려버릴 거야.”

톰은 사냥칼로 무스의 목에서부터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고 빌리는 도끼로 무스의 다리를 찍어 잘라냈다. 그들은 익수하고 날렵하게 가죽을 벗기고 다리만 각을 떼어 몇 개의 부대자루에 나누어 담았다. 그리고는 도끼로 나뭇가지를 찍어다가 적당히 가려두고 내일 다시 와서 운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잡아놓은 무스고기를 다시 운반하러 올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안심이었다. 나도 자동차까지 고기부대를 한 차례 날라놓았고, 톰과 빌리는 두 차례 씩이나 날랐다.

일행이 사냥을 끝내고 델타로 돌아왔을 무렵 회색 빛이 드리운 하늘에는 진눈개비가 내리고 서서히 어둠의 그늘이 산림평야에 뒤덮혀 오기 시작했다. 빌리는 톰을 데려다주고 다시 데리러 올테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일러 주었다.

“오늘 백정노릇 했으니 샤워 깨끗이 하고 속옷까지 다 갈아입고 기다리게. 데리러 올 테니까. 기분 좋게 한 잔 해야지.”

“그야 정해진 스케쥴이 아닌가. 피제이 이따 보자구.”

톰은 바삐 그의 트레일러 홈으로 들어갔다.

“피제이, 샤워하고 좀 쉬고 있게. 집에 가서 준비해놓고 다시 올 테니. 오늘 저녁은 무스 바베큐에 한번 실컨 취해 보자구.”

빌리는 데이빗 영감집 앞에서 차를 세우며 말했다.

“나도 실컷 취하고 싶어. 델타의 밤을 위해서 말이야.”

“자네 입에서 취하고 싶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

“빌리, 나는 내일 무스고기 가지러 갈 수가 없게 됐어.”

나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며 불을 붙였다.

“쉬고 싶어서 그래?”

“아니야. 내일 아침 델타를 떠나야 해. 앤지가 요양원에서 퇴원한다고 연락이 왔어.”

“그래? 반가운 소식이군.”

아침에 폴과 통화한 내용을 빌리에게 알려주고 나서 델타를 떠나야겠다고 말하자, 빌리는 입맛을 다시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앤지는 남편 죠오지보다 오히려 자네의 도움을 받는다면 병을 고칠 수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입장으로 받아들여질 거야. 어떤 관습적인 생각 때문에 말일세”

빌리를 돌려보내고 현관으로 들어서며 내일 아침 일찍 첫 버스를 타고 페어뱅크로 나가 비행기 편으로 앵커리지에 도착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실로 들어가 데이빗 영감부인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지 데이빗 영감도 함께 부인을 따라 들어왔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셨군.”

“내일 앵커리지로 떠나게 됐습니다.”

“아침에 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무슨 일이 있어요?”

나는 무어라고 그들에게 이유를 선뜻 설명할 수가 없었다. 개인사정으로 사업상 이유로도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고 캘리포니아에 가서 볼일을 보고 한국으로 일단 돌아가겠다고 했더니 데이빗 영감은 오히려 잘 생각했다고 응수하며 말을 늘어 놓았다.

“내가 전에 일러주었듯이 이곳에서 자네가 겨울을 나기는 어려울 걸세. 경험을 해보았지만 영하 삼 사십도 심지어 오십 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를 따뜻한 곳에 길들여진 자네의 체질로서는 혹독한 어려움이지. 델타나가 되지 않을 바에야 잘 생각했네.”

토목기사였던 그는 부인과 함께 이십오년 전에 핀랜드로부터 알라스카에 이주하여 건설공사는 물론 미국이 건설한 이십세기의 만리장성이라고 하는 알라스카 석유파이프라인 공사에 고급 전문인력으로 참여했다고 항상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것은 그가 알라스카의 개발에 참여했다는 자부심과 긍지의 표현이었다. 

데이빗 영감은 부인에게 저녁준비 어쩌고 하는 것을 보고, 식사때 기도를 지루하게 하는 그의 습관을 생각하며 아예 바쁜척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다 함께 식사라도 하게 되면 이십분이고 삼십분이고 어찌나 길게 기도를 하는지 내심 짜증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때로는 영어로 기도를 올리고 나서 반드시 자기네 모국어인 핀랜드 말로 다시 기도를 하는 바람에 알아듣지도 못할 뿐더러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그의 기도를 통하여 뜻밖의 위안을 얻기도 했다.

“얼마전애 자넷트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부인이 일러주었다.

“그래요?”

“집에 있으니 들어오면 전화달라고 했어요.”

그냥 내방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그녀와는 저녁에 주막에서 만나기로 약속 되어있으니까 샤워를 하고 짐부터 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알라스카에서 다시 만난 앤지.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그녀는 과거의 애정 때문에 지금 나의 현실에 다시금 깊이 다가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과응보의 삶의 댓가인가. 자넷트 역시 소리 없이 나의 생애에 다가온 여인이었다. 나는 이 두 여인이 함께 나의 마음속 깊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새삼 의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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