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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본은 300년 동안 배타적이었다

Views 327 Votes 0 2016.04.13 16:13:05


 

제 2부  개미 민족

 

 다음 4장에 걸쳐 쓰여진 내용은
이미 백년 전에 일본인들이 구체적으로 설계했던
국가개발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이 책의 앞 부분에서 논했던 속임수의 원리를 이용하여
그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6  일본은 300년 동안 배타적이었다

 

  1989년 가을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The Japan That Can Say No)’이라는 제목의 신간서적이 미국내에 배포되었을 때, 많은 미국인들은 이 책의 공동 저자인 소니(Sony)사의 회장 아끼오 모리따(Akio Morita)와 신따로 이시하라(Shintaro Ishigara) 전 교통성 장관이 표현한 대미관으로 몹시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공동저자인 이들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만연되어 있으며 일본 역사 속에도 오래 전부터 그 뿌리가 내려져 있는 일본인들의 태도를 단순히 표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책의 내용에서 유일한 새로운 점이 있다면 있다면 이러한 그들의 사고방식이 공개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인들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목적의식과 더불어 일본인들은 왜 그러한 태도를 고집하고 있는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일본 역사 가운데 무엇인가를 파악해야만 한다.
  통일국가로서의 일본역사는 16세기에 시작되었다. 그 당시까지도 일본은 강력한 중앙정부가 없는 산만한 영주국가의 집단이었다. 16세기에 이르러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무인정치는 일본의 지배권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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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어린 후계자를 시해하고 그 자신 스스로가 쇼군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는 오늘날의 동경 자리에 일본 정부가 들어선 에도(Edo)성을 구축했다. 일본의 국가발전에 있어서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공헌은 지도자의 후계제도를 확립한 것이었다. 그는 쇼군 노부나께의 권력 후계자가 도요또미 히데요시에 의해 승계지위를 찬탈당하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 자신 스스로가 히데요시의 후계자를 제거해버렸다. 쇼군이 죽었을 때 또는 정치에 경험이 없는 젊은 후계자가 지위를 승계할 때 일어나는 권력의 공백을 피하기 위해,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그가 쇼군 지위에 앉은 지 2년이 지난 1605년에 그의 장남 히데타따(Hidetada)에게 지위승계를 하고자 물러났다.
  이리하여 막강한 권력소유자인 이에야스가 건재한 상태에서 막후의 세력으로 남아 있는 한편, 그의 아들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구축할 수 있었다. 히데다따는 1616년에 그의 아버지가 죽은 다음 1623년 쇼군의 자리에서 물러나 그의 아들에게 권좌를 승계시켰다. 이러한 전통은 도꾸가와의 쇼군제도를 확실하게 굳혀놓았다. 처음으로 일본은 2백년 이상의 세월 동안 정치적 안정과 내적인 평화를 누렸다.

▪ 초기 일본의 쇄국정책

  16세기에 이르러 기독교 선교사들과 서양의 교역자들이 일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가를 대표하는 진정한 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서양 외래인에 대한 국가적 정책도 없었고 따라서 한동안 그들은 일본에 아무 제약도 없이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권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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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계되자 그는 일본이 모든 외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책을 세웠다. 그는 일본인들이 순수한 일본인 관념을 가지도록 촉구했고 서양인들의 진정한 의도는 일본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도꾸가와의 조정은 그들의 철학적 또는 정신적 가치에 별로 큰 비중이 없었던 유교와 불교사상의 재정립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소군제도에 의한 중앙집권 세력의 확고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과 교조적 원리로서 그리고 기독교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606년에 쇼군 조정은 기독교를 배척하는 법령을 만들었다. 그후 6년간에 걸쳐 일본은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모든 일본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종속관계가 확인될 수 있도록 그들이 거주하는 지방의 사원에 등록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들의 문화 속에 침투하는 기독교를 뿌리뽑는 한편 대외교역에 대한 통제는 외래의 영향으로부터 일본 국민들을 유리시키기 위한 또하나의 방편으로 강화되었다. 유럽 상선들의 출입은 2개의 항구로 제한되었다. 영국은 그들에게 유익한 점이 전혀 없다보니 자진하여 일본과의 교역을 포기해버렸다. 스테인 상인들은 그들 나라의 선교활동 때문에 추방되었고 포르투갈의 외교사절들은 1640년에 처형되기도 했다. 1635년까지 모든 일본인들은 해외여행이 금지되었고 이미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외래사상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일본으로의 귀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1641년까지 일본이 서방세계와의 유일한 접촉을 유지한 것은 고립된 나가사끼 항구를 통해서였는데 그곳에는 네덜란드인들만이 데시마라는 섬에만 머물도록 허용되었다. 그 섬은 길이가 약 2백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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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이가 8야드 정도의 좁은 땅으로서 네덜란드인들은 사실상 죄수들 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일본의 해외접촉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사신들의 여행과 필요에 따라 오끼나와 및 한국과 이루어지는 교역뿐이었다. 중국은 일본에게 있어서 유일하고 중요한 대외관계의 상대였으며 중국의 서적들은 서구사상과 무관했다. 일본인들은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그들 스스로가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그러하듯이,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모든 일을 마치 신성한 사명처럼 수행했다. 그들은 대형선박의 건조를 제한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선박은 오직 일본 영토 또는 근해안의 도서지방만 왕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이러한 시기에 서구의 총호 사용을 금했으며 전통적인 일본도의 사용으로 회귀했다. 이리하여 일본은 2백년이 넘는 동안 다른 세계에 대한 문호를 성공적으로 폐쇄시켰다.

▪ 일본에 서방세계의 상륙이 시작되다
  2백년이나 계속된 일본의 쇄국정책 기간 동안 서방세계의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18세기 말에는 산업화된 서방국가들이 일본과 또 한차례 문호개방을 시도할 준비를 갖추었다. 다음에 열거한 연대기록은 서방세계에 일본의 문호개방을 궁극적으로 유도했던 사건을 열거하고 있다.
  1791 두척의 미국선박이 일본 dudgodop 드렁오다.
  1792 러시아 선박 에카테리나(Ekaterina)호의 선장 아담 랙스맨(Adam Laxman)이 북해도에 도착하여 정식 교역협정을 교섭하려고 했으나 에도성의 쇼군 조정으로부터 거절당함.
  1797 네덜란드인이 용선한 미국적선 한척이 나가사끼를 방문.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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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선단이 북해도를 방문.
  1804  미∙소 합작회사 대표가 교역협정을 맺고자 나가사끼를 방문했으나 거절당함.
  1806~7 러시아인들이 일본정부의 허락없이 북해도 북쪽에 통상거래소를 개설.
  1806 쇼군 조정은 북해도 관리들에게 항만을 폐쇄하고 외국적 선박의 출입을 막으라고 지시함.
  1808 영국 선박이 나폴레옹(Napoleon)의 지휘하에 있던 네덜란드 선박을 찾기 위해 나가사끼에 입항.
  1818 영국 선박 에도만(동경만)에 입항.
  1824 무장한 영국해군들이 규슈 남쪽 섬에서 현지 일본인들과 충돌.
  1830 도꾸가와 나리이까라는 젊은 귀족이 행정체제의 개혁과 더 큰 국민적 단결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는 일본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구제국의 군사기술을 도입할 것을 촉구했다.
  1837 뉴 잉글랜드로부터 중국에 입항하는 선박의 숫자가 많아지자 일본을 개방시키기 위한 미국의 관심도가 높아지기 싲가하다. 미국은 일본 항만에서 상품을 공급받고 동시에 쇼군 조정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외국인들에 대한 잔인한 처우로부터 미국의 선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정부와 공식협정체결을 모색하다. 광동에 있던 한 미국실업가는 비무장상선인 모리슨(Morrison)호를 보내어 친선의 뜻을 보였으나 일본인들은 이 배에 불을 지르다.
1838 자유주의파 학자인 다카노 조에이(Takano Choei)는 외국과의 교역을 위해 일본의 개방을 촉구하다. 그는 투옥되어 훗날 자살을 강요당하다.
  1846 미국의 동지나 함대의 사령과 비들(Biddle)이 일본을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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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교역개방을 촉구했으나 무위로 끝나다.
  1849 글린(Glynn)사령관이 나가사끼를 방문, 미국의 요구사항에 대한 새로운 뜻을 전했으나 교역협정체결을 위한 그의 제안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그는 오지에 유배되어 억류생활을 하고 있던 15명의 미국선원들을 인계받았을 뿐이었다.
  1858 미국인 함장 마티우 페리(Matthew Perry)가 전 미국해군 4분의 1에 해당하는 3척의 프리깃트함과 5척의 전함을 지휘하고 에도만에 진입하다. 그는 미국의 필 모어(Fill More)대통령이 일본황제에게 보내는 요구조항들을 일본이 수락하도록 압력을 가하다. 페리(perry)는 대답을 듣기 위해 다음해 봄에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함.
  1854 페리는 3월 31일에 조인한 가나가와(Kanagawa)조약을 가지고 일본으로부터 귀환하다. 일본은 미국선박에 대해 2개의 항구를 개방하고 시모다(Shimoda)에 미국영사가 주재하는 것을 허락하며 조난선의 미국선원들에게 온당한 대우를 제공하는 한편 미국에게 최혜국 대우를 제공한다는 서방제국에 문호개방을 가져왔으며 뒤이어 영국, 네덜란드 및 러시아와 유사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  일본의 앙갚음
  일본인들은 1854년에 군사적 보복에 대한 묵시적인 위협으로 미국의 요구에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그들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맞선 중국인들의 무기력함을 지켜보았고 서방과의 군사적 대결의 결과에 대해서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중국인들이 패한 후 그들에게 돌아온 1842년 남경조약의 일방적인 조건은, 쇼군 조정으로 하여금 자진해서 조약에 서명하는 것이 정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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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강요에 의한 것보다는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2백년간 지속된 일본의 고립정책과 내분은 서방제국의 무력적인 그늘 밑에서 종말을 가져왔다.
  뒤이어 일본인들이 생각했던 대로, 부도덕하며 퇴폐적이고 잡스러운 외래문물들이 밀려들어왔다. 신도에서는  ‘청결’이 신에 대한 경건한 마음가짐을 뜻한다. 일본인들은 청결하지 못한 외국인들을 몹시 경멸했고, 이러한 외국인들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능력에 대해 분노와 수치심을 느꼈다.
  그 시대에 공통된 슬로건은 ‘천황을 받들자’ 그리고 ‘야만인을 몰아내자’였다. 황제는 쇼군 제도하에서 2백년 동안 실권이 없는 상징적 우두머리에 불과했기 때문에, 또한 쇼군 조정은 외래 야만인들을 몰아낼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슬로건은 반정부적인 대중의 의사표시였다.
  1863년 조슈의 영주를 모시고 있던 사무라이(Samurai)는 쇼군조정이 외래 야만인들에 대해 무력사용을 꺼려하자 불안해진 나머지 독자적으로 그들을 추방하는 일을 맡고 나섰다. 그러나 미국 전함들은 그들이 새로 구입한 두척의 무장선박을 즉시 격침시켜버렸다. 프랑스군은 그들의 요새와 무기창고를 파괴해버렸다. 조슈의 사무라이들은 그들의 요새를 다시 구축하고 집요하게 상대도 되지 않는 대결을 계속했으나 다음해에 불란서,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미국의 연합함대로 편성된 17척의 전함이 이 요새들을 또 다시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그러나 조슈의 사무라이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사쓰마 영지의 사무라이에 의해 한 영국인이 살해되자 영국함대가 출동하여 사쓰마의 요새들을 산산히 파괴해버렸고 사쓰마로부터 보상금조로 십만 파운드를 강제로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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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쓰마와 조슈 부족의 사무라이들은 역시 또다른 한가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250여년 전, 그들은 도꾸가와 이에야쓰가 권력을 잡을 때 그의 군사들에게 패배를 당했던 것이다. 도꾸가와 쇼군에게 패배를 당한 옛날의 수치를 회복하려는 공동목표와 서방제국의 군대에게 연전연패를 당하는 굴욕감으로 가득찬 두 부족은, 쇼군 조정을 상대하기 위한 시민전쟁에서 그들의 병력을 통합하게 되었다.
  양측의 궁극적인 목표는 외래침입자들을 몰아내는 것이지만 어느 쪽도 그들의 긴박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이들 외래 침입자들을 이용했다. 프랑스서는 쇼군을 지원했고 영국은 쇼군 조정을 제거하고 황제를 복위시키기 위한 속셈으로 사쓰마와 조슈의 사무라이를 지원했다.

▪  황제의 복위

  사쓰마와 조슈 부족은 쇼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868년 명치(히로히또 천황의 할아버지)황제는 열다섯살에 즉위하였고 1912년까지 일본을 통치했다.
  서방 강대국들의 수중에서 군사적인 패배만을 거듭한 과거의 쇼군조정은, 새로운 지도층에게 산업화된 서구제국과의 대결에서 그들의 중세기적 구식무기가 무기력함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868년에 새황제는 아주 중요한 문서인 ‘제국선언 5개항’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일본의 긍지를 되찾고 자국의 운명을 관리하기 위한 기본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선언의 처음 네번째 항목들은 내적인 통일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다섯번째와 마지막 항목에서는 일본의 대외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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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약 문서는 국가 통일과 서방세계로부터의 기술도입의 필요성에 대한 1830년 도꾸가와 나리아카의 제안을 반복한 것이었다.
  제1항 : 모든 국정사항은 공개토론으로 결정된다.
  제2항  : 일본 국민은 황제로부터 그의 부하에 이르기까지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심으로 단결한다.
  제3항 : 중앙정부와 지방방백들은 동일한 목표를 향해 진력한다. 황실과 일반백성은 평등하다.
  제4항 : 일본은 나락은 관습을 타파한다.
  제5항 : 일본은 어떤 출처에서 유래되었든 상관없이 지식과 기술을 받아들인다. 일본은 미국과 유럽에 유학생을 파견하며 해외 전문인력을 일본에 초빙하여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지식을 보급하도록 한다.
  이와 같은 문서에 의해 일본은 그 자신을 세계적인 강대국이 되기위한 정밀한 궤도에 올려놓았다. 현대화를 위한 일본의 공약과, 강해지려는 그 의지는 서방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겪은 굴욕과 외래야만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겠다는 결단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일본의 문화는 진화적인 단계를 거쳐 발전된 것이 아니라 자체의 혁명과 남의 문화를 선택하여 받아들임으로써 발전되었다. 일본인들은 중국문화에서 그들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실용적인 것을 선택함으로써 2백여 년 동안에 그들의 원시적 사회를 고도의 문명사회로 전환시켰다.
  일본문화 가운데 많은 부분이 외부로부터 빌려와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서양 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인들의 경우에는 중국인들보다 훨씬 용이한 일이었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외국인을 배척했던 2백년 기간을 제외하고 일본은 외부세계로부터 관습과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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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역시 서구세계로부터,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식민지를 이용하는 것을 배웠다.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한국, 대만, 그리고 오끼나와를 일본의 식민지로 얻었다.

▪  신판 사무라이
  명치 정부가 점차적으로 낭비적이고 구시대적인 사무라이 계급신분을 제거해가자 일부 사무라이들은 새로운 전쟁터 즉 사업으로 전향했다.
  훌륭한 사무라이는 역시 훌륭한 사업가로 변신했기 때문에 많은 사무라이들이 사업에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의 미쓰이(Mitssi), 미쓰비시(Mitsubishi) 그리고 스미도모(Sumitomo)같은 거대기업들 모두가 출신 근본이 사무라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시대에는 지배계급들이 상업에 별로 관심을 나타나지 않았다. 명치의 복위와 일본의 현대화를 위한 황제의 교서가 발포된 이후, 정부는 일본의 산업적 목표를 추진하는 데 능력이 있는 개인들에게 재정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특정한 실업계의 지도급 인사들을 위해 그들에게 유리한 법률과 규정을 만들어 장애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데 편파적인 입장을 취했다. 정부는 역시 더 큰 산업적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소규모 기업들이 규모가 크고 수익성이 높은 기업에 합병이 되도록 압력을 가했다.
  정부에서 경영하는 기업들이 수익율이 별로 없다는 것이 판명되자 정부는 황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일본인들에게 그 지분을 팔아버렸다. 이러한 거래의 내용은 공개적으로 처리되지 않았다. 정부의 목적은 제국주의 일본의 안전과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사업적인 목적과 대상은 명치 황실의 신성시된 선언으로써 정립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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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정부는 산업발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한편 사업에 필요한 운영자금을 마련하는 데 지원을 했다. 국가 경제발전을 추진함에 있어서 필요에 따라서는 한 업체가 해운에서부터 광산업에 이르기까지 또는 섬유업에서부터 금융업까지도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명치 조정에 있던 대부분의 지도급 관리들은 이중의 연계적 임무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정치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업적인 면이었다. 심지어 명치 조정의 외무대신이었던 이노우에(Inoue)도 황실과 미쓰이 재벌 사이에 중개자 역할을 했다.

 ▪  코를 맞대고 숨쉬다
  현재의 일본정부와 일본기업들 사이에 유지되고 있는 화목한 관계는 한세기가 넘는 전통에서 비롯된다. 미쓰이, 미쓰비시 그리고 스미도모의 선조들은 명치 황제의 조정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상호이익을 도모했다. 그들은 전시에 제국 황실을 지원했다. 기업합병과 제휴를 통해 대기업과 정부의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는 끈끈한 관계가 확고히 맺어졌다.
  큰 기업들은 1880년대에 정당운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주된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미쓰비시의 창설자인 이와사끼(Iwasaki)는 일본의 첫번째 정당인 입헌진보당의 창설에 주된 스폰서였다.
  같은 시기에 미쓰이는 자유당(Liberty Party) 창설에 있어서 유사한 역할을 해냈다. 역사적으로 일본에 있어서 정부와 대기업은 대가족의 구성원들이었다. 중국인들의 말을 빌면 그들은 ‘똑같은 코로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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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열조직
  소위 ‘게이레스’는 기업의 카르텔로서는 최선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긴밀한 연대관계를 가지고 함께 사업을 도모하는 기업과 은행 그리고 정부기관들은 한 가족과 같은 단위를 이룬 연합체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이와 유사한 관계가 반기업합동입법에 의해 불법화되어 있지만 일본에서는 기업연합이 개인적 또는 정치적, 가족관계와 명치 황실의 영주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발전되었다.
  계열제도는 일본의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우발적인 현상이 아니며 그것은 일본산업경제의 기본적인 단위를 형성하고 있다.

▪  티.분 피킨스의 모험
  1989년 텍사스의 석유재벌 티.분 피킨스(T. Boone Pickens)는 일본의 유수한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인 고이또(Koito)사의 주식 26.2퍼센트를 확보하기 위해 미화 12억불을 지출했다. 대주주로서의 그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피킨스는 재무관계 자료도 얻을 수 없었고 이사회의 대리권도 얻을 수 없었다. 도요다 자동차회사는 고이또의 주식을 오직  19퍼센트만 가지고 있지만 이사회에서 3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주요 경영간부 임명에도 참여하고 있다. 피킨스가 생각할 때, 도요다는 고이또의 가장 큰 거래선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해상충의 요건을 구성하고 있다.
  피킨스는 도요다와 고이또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고 비난을 했다. 물론 그의 말이 옳다. 그들이 숨기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 가운데 하나는 도요다사가 그들이 구매하는 부품의 가격을 결정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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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또의 이익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인들은 미국인들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해서 계열제도를 단순히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체험으로 알고 있듯이 계열제도는  예외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으며 반면에 미국의 경제제도는 붕괴의 위기에서 허덕이고 있다. 그들은 자유무역과 공정거래 그리고 공개경쟁에 대한 제안에 말로써는 수긍할 수 있어도, 그들에게 경제적인 기적을 가져다준 이제도를 진정으로 바꾸어보겠다는 뜻은 결코 없다.
  피킨스는 도요다사와 함께 고이또사의 파트너로서 역시 니산(Nissan), 마쓰시다(Matsushida) 그리고 많은 일본 은행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이들 일본인 업체의 관계자 중에 어느 누구도 피킨스씨에게 진정한 성의를 보이거나 또는 그에게 거래내역을 공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태도를 취하도록 누구에게 강요당하는 것도 아니다. 피킨스씨의 동료사업가들은 그들의 정치적인 옛 친구들과 자유무역과 개방경제에 대해 잡담을 늘어놓는 동안 일본경제에 대한 외부의 영향이 무기력해지고 있다는 중요성을 잊고 있다는 사실을 옛 친구들에게 상기시켜 줄 것이다.
  1990년 6월 28일 피킨스씨와 그의 수행원 일행은 고이또사의 연례 주주총회에 참가했으나 그들은 불쾌한 수모를 당했다. 세시간에 걸쳐 일대 혼란을 치룬 후 그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갔던 7개항의 제안 중에 어느 한가지도 채택되지 않은 채 그리고 이사회의 대리위임권도 얻지 못한 채 철수했다.
  피킨스가 주주들에게 연설을하는 동안 회의장에서는 그를 향해 야유가 터져나왔다.
  “꺼져, 미 의회에 가서 호소해보라구.”
  “우리가 맞상대 해줄테니까. 우리는 미의회 같은 건 두렵지 않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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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벌써 경제전쟁에서 미국을 물리쳤다구!”
  “꺼져, … 빌어먹을 놈들!”
  피킨스는 그의 싸움을 계속하기로 다짐했다. 그는 재무관리 자료를 얻기 위해 일본법정에 소송을 제기했으며, 그는 앞으로 휴스턴에서 열리게 되는 경제정상회담에 이 문제를 제기할 것을 선언했다. 피킨스측의 가장 믿을 만한 위협적인 무기는 게이레스와 같은 기업 카르텔제도가 미국내 법에서는 불법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제도에 의해 생산되는 상품의수입은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미의회에 제소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워싱턴에 있는 강력한 일본측 로비팀의 저지 공작을 극복하고 제소하는 데 성공한다면 일본은 언젠가 피킨스의 제안들을 수용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근본적인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해 필요한 그들의 경제제도에 대한 대체방안을 내놓을 것 같지는 않다.

▪  처세와 뿌리
  일본의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는 1868년에 발표된 ‘제국선언 5개항’이다. 첫 4개항은 일본인들의 내적인 의식변화에 대한 강조이다. 제5항은 서방세계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으며 그것은 지난 백여 년 동안 일본이 외교 및 경제정책을 입안하는 데 기본지침으로 활용되었다.
  서방의 옵서버들이 끊임없이 격찬을 해온 일본 사회의 여러가지 특이한 국면은 제국선언 5개항목에 의해 추적해볼 수 있다. 분명히 일본경제의 전반적인 성공은 이 문제에 대한 끈질긴 집착의 결과이다.
  이미 앞에서 그 조항을 살펴보았지만 그내용을 분석해보면 그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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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본의 시대적인 관습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조명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제1항 : 모든 국정사안은 공개토론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그 결과는 단체협의 결정을 통해 공동목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미국인 매니저들은 일본인들의 단체협의 결정의 진행과정을 보고 굉장히 깊은 감명을 받고 있다. 그러한 절차는 개인 또는 소규모 단체가 정책을 결정하도록 허용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단 결정이 이루어지면 실천하는 과정은 훨씬 더 효과적이다.

  제2항 : 일본인은 황제에서부터 그의 신하에 이르기까지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심으로 단결한다.
  이 조항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연합전선에 참여하도록 명령을 한 것이다. 외세의 침랑에 뒤이어 모두에게 하나의 공통의 적이 밝혀졌다. 제2항과 3항은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위해 일본국민이 단결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일본의 기업내에서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주춧돌이다.

  제3항 : 중앙정부와 지방방백들은 동일한 목표를 향해 전력한다. 황실과 일반백성들은 평등하다.
  사무라이와 대부간의 충성에 대한 전통적인 결속은 평생 변할 수 없는 맹서에 바탕을 두었다. 사무라이의 묵숨과 그의 가족들의 생활은 대부의 자산이었다.
  오늘날 일본에서 피고용인과 고용주간의 약속도 이와 똑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본의 근로자들은 하루에 12시간을 기꺼이 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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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그렇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일본인 개인에게 있어서도 이렇게 확고한 충성의 결속은 고용주와의 관계를 지속시키며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은 일본의 국민과 문화에까지 확대 연장되고 있다. 심지어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도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충성을 표하고 있다.
  로스엔젤리스에서 일본인 가정주부들은 대개 같은 상품이라면 미국인이 소유한 슈퍼마켓에서 구매하기보다는 일본인이 소유한 상점에서 사겠다고 말했다.
  이 항목은 일본 산업사회에서 경영진과 근로자 사이에 별로 차별을 두지 않는 하나의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고위 경영진과 하급직 노동자간의 차별이 미국의 경우보다 적은 편이다. 이 두 계층간에 급료수준도 일본에서는 별로 큰 차이가 없다. 경영진과 근로자들은 작업현장에서 똑같은 유니품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으며 함께 사가를 부르고 운동을 하기도 하며 아침에는 회사기를 향해 경의를 표한다.

제4항 : 구시대의 낡은 관습을 버리고 자연의 순리에 따른다.
  이 조항의 가장 드라마틱한 실례는 1868년 ‘제국선언 5개항’이 발표된 후 사무라이 계급의 의도적인 제거였다. 1천년 동안에 걸쳐 사무라이는 국가의 방패역을 수행해왔지만 서구식 군사기술과 맞서자 이들 중세풍의 무사들은 낭비적이고 비능률적인 구시대의 존재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자국 국민들 가운데 유일한 무장세력들의 생활보장과 특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경우 국가로서는 매우 심각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사무라이 계급의 배재는 일본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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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선언을 수행하기 위해 이루어진 언악의 심각성을 의미한다.

  제5항 : 새로운 지식을 범세계적으로 받아들여 제국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
  3백년 동안 서구문명과의 접촉을 거부해온 끝에 5개항 선언은 일본국민들에게 서구의 과학기술에서 유용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도록 권장하고 있다. 과거 40여 년 동안 일본은 서구의 기술혁신을 받아들여 실용화하고, 제조업을 일으켜 자국의 상품을 해외에 수출함으로써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일본은 소비제 전자제품, 마이크로 침(Micro Chips), 그리고 수많은 첨단기술산업에서 세계적인 선진국으로 알려졌지만 그러한 기술 가운데 일본에서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서구의 지식을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관습에 맞도록 접목시킨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특이한 천재성이라 하겠다.
  그 결과 그들은 외국으로부터 도입한 기술혁신을 다시 정제하여 새로운 용도를 찾아내고 그것을 생산하여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 보다 더 질좋은 상품을 시장에 내놓는 것이다. 다섯번째 항목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서구의 지식을 일본식 사고 관념 속에 동화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 모두가 더 훌륭한 상태로의 발전을 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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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대계
  일본 기업들은 그들의 십년 또는 오십년 계획에 대해 자랑하기를 좋아하지만, 어느 누구도 지난 백년 동안에 일본이 추구해온 국가목표에 대해 서구인에게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목표는 1868년 명치 천황에 의해 입안결정되었는데, 그는 일본이 부유한 나라가 될 것이며 일본인들의 생존에 필요한 군사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목적들을 추구함에 있어서 일본인들은 서구의 기술을 이용하고 자신들의 전술전략으로써 서방세계를 물리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19세기 중반부터 일본인들이 수행해온 모든 일은 이러한 목적들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부국강병을 위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본인들은, 그들의 산업에 필요한 자원 공급을 확보하고자 식민지확장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확장주의 정책은 궁극적으로 일본을 세계대전의 주역으로 만들었다.
  일본이 엄청난 군사적 패배를 당하고 난 후, 서방의 전문가들은 50년 이내에 자립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견했다. 그들은 일본국민들의 불같은 결의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후 일본의 재건과 산업화는, 천황으로부터 일반 서만에 이르기까지, 목적이 분명하고 결의가 확고한 국가의 의지력으로 일으켜 세운 기적이다. 일본은 도시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불과 40여 년 동안에 세계 최대의 산업 강대국의 하나가 되었다.
  2차대전 이후 일본의 군사력 재건에 대한 제한은 일본으로 하여금 그들 국가의 경제산업발전에만 진력하게끔 만들었다. 그들은 엉클샘(Uncle Sam, 미국정부에 대한 속어)의 등에 업혀 재빨리 경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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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의 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만일 일본이 미국의 원조를 받지 않았더라면 스스로 일어서기까지는 오십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일본의 재계 지도자들은 십년 앞을 내다보는 일본 기업의 지혜에 대한 실례들을 열거하면서 지나치리만치 겸손을 떨고 있다. 사실상 일본기업들은 서구인들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 일본의 목표는 백년동안 한결같은 것이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정부와 개인 기업이 혼연일체가 되어 명치천황이 제시한 똑같은 계획을 추진해냈다.

▪  재무장한 일본
  서방국가들이 일본의 재무장 결과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는 동안 중국, 대만, 그리고 한국정부는 서구인들보다 일본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장개석의 미망인은 1987년 작고한 남편의 일백회 생일 기념행사에서 연설을 했다. 그녀는 일본인의 태도에서 점진적으로 민족주의가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하면서 우려를 표했다. 만약 그러한 민족주의가 군사력과 맞물리게 된다면 이것은 위험신호가 될수 있다고 그녀는 경고했던 것이다.
  로버트 네프(Robert Neff)는 1989년 9월 25일자 비지니스 위크에 기고한 글에서 근대 일본의 감정적 열기는 일본제 상품과 같은 국산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네프는 소비상품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는 군수장비 즉 제트 전투기, 탱크, 헬리콥터 그리고 미사일에 대한 내용만을 다루었다. ‘일본에서는 구사적 자위전력에 대한 새로운 선전표어가 갑작이 유행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방어장비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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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타곤(pantagan:미국방성)은 일본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그들이 분명한 뜻을 밝히기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일본인들 자신이 그러한 것을 분명히 해명할 리가 없고, 펜타곤으로서도 일본의 속임수를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진정한 의도는 결코 밝혀질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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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역사는 훌륭한 스승이다. 아시아를 이해하려면 먼저 중국을 이해해야 한다. 중국의 문화는 고대적인 유풍을 지녔기 때문에, 다른 아시아인들의 문화적 뿌리이기도 하다. 필자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내용 가운데 많은 부분이 다...

11. 중국은 서양을 어떻게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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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 염제의 황제의 후손 일본민족이 있기 전에, 그리고 한국민족이 있기 전에, 중국민족이 존재했다. 중국의 역사기록은 B.C. 2697년에 시작되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중국민족은 염제와 황제의 후손들이라고 쓰여 있다. 중국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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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대만의 번영 20년전 대만의 한 젊은이가 대형 체인망을 갖고 있는 어느 미국백화점의 구매사무소에 들어섰다. 전에 한번도 미국에 와본 적이 없는 그는 화려한 현대식 사무실에 들어서자 긴장하고 두려웠다. 그는 사무실 입구의 프론트데스크에서 들고...

15. 성장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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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부 게임은 끝나고 17 성공적인 처신 ▪ 인정 일본, 한국, 그리고 중국의 문화는 인정에 대한 공자의 개념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 개념은 세 나라의 언어에서 똑같은 중국어로 표현되며, 영어로는 ‘human feelings’로 번역된다. 그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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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미국은 종이호랑이인가 미국은 심각한 경제문제에 직면해 있다. 연간 2천억달러에 이르는 예산적자와 함께 자신의 미래에 역행하는 빚을 짊어지고 있으며, 빚에 대한 상환시기는 급속히 다가오고 있다. 미국의 중공업은 노후한 기술로 운영되고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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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십육계 36계란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처세방법을 다룬 고대중국인들의 전략전집이다. 이것은 잘 알려진 일종의 중국 민속문학으로 약 천오백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전집은 6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에는 6개 관련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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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후안흑심 1911년 성도일보는 이충창씨가 쓴 후흑론이란 제목의 수필을 연재하기로 했다. 이 수필은 3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었었으나 첫회분이 실리자마자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는 바람에 나머지 연재분을 발표하지 못했다. 그후 얼마 안있어 이 에세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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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미덕과 위선 나는 서구의 학자들이 집필한 현대 일본에 대한 저서들을 읽으면서, 저자들이 모든 내용을 일본인의 입장에서 의견을 개진한 무비판적인 태도에 놀랐다. 일반적으로 서구인의 동양관은 아시아 문화의 고상함과 신비적인 내용에 대한 그들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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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업 사무라이 ▪ 사무라이의 기원 표면상으로 볼 때 일본은 현대산업사회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봉건군주사회의 과거에 깊이 뿌리내린 사회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은 아직도 사무라이 전통에 얽매여 있다. 일본을 이해하려면 누구나 이전통에 관련된 ...

9. 모리따와 이시하라

9 모리따와 이시하라 소니(Sony)사의 회장 아키오모리따와 전 일본 운수성장관 신따로 이시하라가 공동저술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The Japan That Can Say No)’ 이란 책은 1989년 일본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모리따와 이시하라가 저술한 내용은 일본...